(다)


그러다가 금년 가을에 상인(上人) * 이 산에서 내려왔으므로, 내가 그를 보고는 너무 기뻐서 하루 종일 붙들어 두었는데, 그 때 상인이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어 보여 주면서 말하기를, “내가 나의 초당을 상죽(霜竹)이라고 이름하고는 육우(六又) 김비판(金祕判)에게 청하여 큰 글자를 써서 현판으로 걸었다. 앞으로 상죽에 대한 시가(詩歌)를 천신(薦紳)들 사이에서 구하려고 하니, 그대가 기문(記文)을 써주면 좋겠다.”


내가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내긴 하였지만, 나를 초목에 비유한다면 저력(樗櫟)이나 포류(蒲柳)일 따름이니, 어떻게 감히 우리 상인의 초당에 기문을 쓸 수가 있겠는가. 비록 그렇긴 하지만 상인이 일단 나를 비루하게 여기지 않았고 보면, 내가 또 어떻게 들은 것을 가지고 고해 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대저 대나무도 하나의 식물이다. 식물이 서리와 이슬을 만나면 급격하게 변해서 가지가 꺾여 부러지고 낙엽 져 떨어져서 더 이상 생기가 없어지고 만다.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우고 있는 식물 모두가 이러한데도 오직 대나무만은 가지도 여전하고 잎도 여전한 가운데 홀로 우뚝 서서 향기를 내뿜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예로부터 운치 있는 사람들과 절개 있는 선비들 거의 대부분이 대나무를 사랑하였으며, 심지어는 차군(此君)으로 지목하는 사람이 나오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아, 사람의 속성을 살펴보건대, 눈으로 색(色)을 취하고 코로 냄새를 취하고 귀로 소리를 취하고 입으로 맛을 취하고 팔과 다리로 편안함을 취하는 과정에서, 저 양심을 해치게 되는 것들이 어찌 식물이 서리와 이슬을 만나는 정도로만 그칠 뿐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 중에서 이에 대해 피할 줄 아는 자가 드물기만 하다.


상인은 불자(佛者)이다. 따라서 소위 색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이라는 것에 대해서 한 번도 일념(一念)이 동요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자기의 초당을 상죽(霜竹)이라고 명명하였고 보면, 이는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 것일 뿐만이 아니요, 대개는 기운이 비슷하기 때문에 서로 구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 상인(上人): 지혜와 덕을 갖추어 타인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고승.



― 이숭인, 「상죽헌기(霜竹軒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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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돕는 <보기>


37. (다)의 내용을 <보기>와 같이 구조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