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문학/현대산문 (10)

문학/현대산문

홍성원, 「무사와 악사」(2017, 고2, 9월)

그들은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하나같이 고개들을 숙인 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꾸중 듣는 어린아이들처럼 그들의 표정 속에는 공포와 불안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내 몸에서 갑자기 모든 불안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목을 조르던 공포와 긴장이 뜻밖에도 아주 빠르게 안도와 기쁨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거사는 실패했다. 그리고 거사가 실패했 다고 생각하자, 실패가 오히려 아주 당연한 귀결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불안과 공포에 떤 자신이 나는 이 순간 견딜 수 없이 우스꽝스러웠다. 지금까지 나를 짓눌러 온 온갖 불안에서 나는 불과 몇십 초 사이에 깨끗하게 해방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나는 또 한 번 무서운 공포에 휩싸였다. 그것은 안도감에 잠긴 나를 몽둥이로 내려치듯이 통렬하게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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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줄자」(2017, 고2, 11월)*

[앞부분 줄거리] 시골 소농의 아들로 자란 방태흥은 상경하여 중학교 교사로 일하면서 고생 끝에 6년 만에 자신의 집을 짓게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옆집에 사는 이 전무가 찾아와 방 씨의 집이 자신의 집을 침범했다며 방 씨의 집 벽을 허물라고 요구한다. 이 전무와 방 씨는 다시 만났지만 각자의 입장만 주장하다가 서로 타협점을 찾지 못한다. “아저씨, 옆집에서 찾아요.” 식모아이가 볼멘소리로 투덜대며 들어왔다. “㉠ 자기가 무슨 높은 양반이라구 오라 가라 야단이람.” “누가 찾는다구?” “옆집에서요. 뭐 잠깐 왔다 가라나요? 아저씨, 구멍가게 집 아주머니가 그러는데요, 그 집 순 무식한 벼락부자 집안이래요.” “벼락부자?” “그 남자가 전에는 말예요, 지금은 사장인 자기 형이랑 가짜 구리무를 집에서 만들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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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 「어떤 유서」(2018, 고2, 11월)*

송노인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더욱 심한 손해를 보았다. 란 환지 원칙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송노인의 경우는 도합 천오백열 평 중 원지로 받은 것은 불과 사백 평 뿐이고 나머지 천백열 평은 말도 안 되는 박토──산을 깎은 개간지를 환지로서 받았던 것이다. ㉠ “죽일 놈들!” 송노인의 입에서는 또 이런 말이 나왔다. 환지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불평을 했다. 마을 환지위원들이 공정하지 못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진흥공사의 ××사업소 사람들도 그러고 그랬으리란 소문도 나돌았다. 이런 소문들이 맹탕 거짓말이 아니란 것은, 가령 마을 환지위원들 가운데는 그런 억울한 변을 당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과 또 환지위원들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덕을 본 셈이라는 얘기들을 미루어서 능히 짐작할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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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아저씨의 훈장」(2018, 고2, 9월)*

[앞부분의 줄거리] ‘나’는 너우네 아저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전쟁 때 자식 대신 성표를 데리고 피난했던 너우네 아저씨를 떠올린다. 밤새도록 반짝반짝 닦은 크고 작은 자물쇠를 앞뒤로 주렁주렁 달고 장군처럼 거만하고 당당하게 장사를 나가는 너우네 아저씨의 권위는 완벽했다. 내 자식을 사지에 뿌리치고 조카자식을 구해 내서 공부시킨다는 게 그렇게 위대한 일일까? 나는 그의 당당함에 압도된 채, 속으론 ‘언제고 그의 위 대성이 터무니없는 가짜라는 걸 보고 말 테다’라는 엉큼한 생각을 키우고 있었다. 휴전이 되었지만 우린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38 이남이었기 때문에 꼭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우리는 하필 우리 고향 쪽에서 남으로 쳐진 휴전선이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다. 너우네 아저씨인들 그때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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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국, 「동행」(2018, 고2, 6월)

[앞부분의 줄거리] 눈 덮인 밤길을 억구와 큰 키의 사내(형사)가 동행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억구가 6·25 때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득칠을 우연히 만나 술자리 끝에 그를 살해하고, 부친의 산소 곁에서 죽을 심산으로 고향으로 가는 길임이 드러난다. 옆 산 소나무 위에 얹혔던 눈무더기가 쏴르르 쏟아져 내렸다. 마치 자기 무게를 그렇게 나약한 소나뭇가지 위에선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듯이……. 그때 좀 먼 곳에서 뚝 우지끈 소나 뭇가지 부러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이때 억구가 느닷없이 키 큰 사내의 앞을 막아 서며, “선생, 난 득수 동생놈을, 그 김득칠일 어제 죽였단 말이오. 이렇게 온통 눈이 내리는데 그까짓 걸 숨겨 뭘 하겠소. 선생은 아주 추악한, 사람을 몇씩이나 죽인 무서운 놈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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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휘 원작 「불꽃」(2019, 고2, 6월)

S# 29. 현의 집 현을 끌고 오는 고 영감. 끌려오며 무어라고 잘못했다고 비는 현. 마당에 나뭇가지를 말리던 현 모 의아해 일어난다. 고 영감 : (들어서며 대뜸) 너 야 앞에서 똑똑히 말하거라. 현이 애비가 왜 죽었느냐? 현 모 : 무슨 말씀이신지 전……. 고 영감 : 그게 훌륭한 죽음여? 그래서 철없는 자식헌티도 애비처럼 죽으라구 부추기는 거여? 현 모 : 아버님 고정하시고……. 고 영감 : 그 따위로 자식을 키우려거든 당장 오늘이라도 현인 내가 데려가서 키울란다. 현 : 싫어. (할아버지 손을 탁 뿌리치고 밖으로 뛰어나간다.) 현 모 : ……. 제가 잘못했습니다. 허지만 현이 아버지 죽음을 못난 죽음이라고는 말어 주세요. 고 영감 : (조금 누그러지며) 지금 세상에 똑똑헌 놈 잘 되는 것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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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흥길, 「날개 또는 수갑」(2019, 고2, 6월)

[앞부분의 줄거리] 동림산업은 제복을 제정하려고 준비위원회를 통해 사원들의 의견을 듣기로 한다. 사원들은 반대하지만 준비위원회는 일방적으로 제복 제정을 결정하고, 회사는 재단사를 불러 사원들의 치수를 재며 제복 도입을 강행한다. “거기 있을 줄 알았지. 나야, 장이야. 우기환이도 같이 있나?” 전화를 받자마자 장상태가 낮고 빠른 말씨로 지껄여왔다. “즉각 들어와 줘야겠어. 과장이 잔뜩 뿔따구가 나갖구 방금 사장실로 들어갔어.” “재단사들은 다 철수했나?” “아직 다른 사무실을 돌고 있어. 그 친구들이 철수하기 전에 자네가 들어와야 일이 무사해질 것 같애.” “지금은 들어가고 싶잖아. 친구가 찾아와서 잠깐 외출했다고 그래.” “재는 거야 상관없잖아. ㉠ 입고 안 입는 건 그 후의 일인데 뭘 그래.” 민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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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 「손풍금」(2019, 고2, 3월)

남파 간첩으로 체포되어 21년을 복역하고 작고한 작은할아버지의 생애를 석사 논문의 주제로 삼은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과거사를 묻는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반응을 이끌어내려 노력하는 한편, 다른 가족에게서도 작은할아버지의 행적에 관한 증언을 듣고 기록한다. (가) 작은할아버지의 생애와 그분이 살았던 시대를 두고 석사 논문을 쓰겠다는 마음이 애초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분이 설령 남이라 해도 분단 현실에 희생양으로서 당신 생애가 관심을 끌 만했는데, 제삼자가 아닌 바로 우리 집안 어른이었다. 논문 부제로 붙인 ‘분단 시대 어느 사회주의자의 생애’에 합당한, 고난으로 점철된 그분 생애는 누구든 정리해 볼 만한 값어치가 있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고 남북 화해 물꼬가 햇볕 정책이란 이름으로 트이자 북한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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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2018, 고2, 3월)

(가) 고향이 그립다는 것이지? 작자는 나로서는 생전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시골에서 올라와서 서울을 빙빙 돌아다니며 사는 놈인데 그리고 보니 작자의 저 광증에 가까운 생활 태도는 무전 여행자의 그것 아니면 촌놈이 서울에 와 보니 모든 게 신기하기만 해서 어쩔 줄을 몰라, 아니 무턱대고 우쭐대고 싶은 저 촌뜨기 의식에 가득 차서 괜히 심각한 체해 보았다가 시시하게 웃어 보았다가 술 사달라고 조르고 사랑이 어쩌고 하고 있는 게 분명한 것이다. 고향이 그립다는 것이지? 그러나 고향이 그리운 것 같지도 않다. 작자의 고향에는 자기의 어머니와 누이가 살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만 작자는 그들에게 대해서 별 애착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 것이다. 나는 작자에게 보낸 그의 어머니의 편지를 한번 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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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하, 「나무」(1994, 수능)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새가 있다.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 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 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전심(以心傳心) 의사(意思)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바람은 달과 달라 아주 ㉡변덕 많고 수다스럽고 믿지 못할 친구다. 그야말로 바람장이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올 뿐 아니라, 어떤 때에는 쏘삭쏘삭 알랑거리고, 어떤 때에는 난데없이 휘갈기고, 또 어떤 때에는 공연히 뒤틀려 우악스럽게 남의 팔다리에 생채기를 내 놓고 달아난다. 새 역시 바람같이 믿지 못할 친구다. 자기 마음 내키는 때 찾아오고, 자기 마음 내키는 때 달아난다. 그러나 가다 믿고 와 둥지를 틀고, 지쳤을 때 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