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하나같이 고개들을 숙인 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꾸중 듣는 어린아이들처럼 그들의 표정 속에는 공포와 불안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내 몸에서 갑자기 모든 불안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목을 조르던 공포와 긴장이 뜻밖에도 아주 빠르게 안도와 기쁨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거사는 실패했다. 그리고 거사가 실패했 다고 생각하자, 실패가 오히려 아주 당연한 귀결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불안과 공포에 떤 자신이 나는 이 순간 견딜 수 없이 우스꽝스러웠다. 지금까지 나를 짓눌러 온 온갖 불안에서 나는 불과 몇십 초 사이에 깨끗하게 해방된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나는 또 한 번 무서운 공포에 휩싸였다. 그것은 안도감에 잠긴 나를 몽둥이로 내려치듯이 통렬하게 후려쳤다. 누군가가 돌연 자리를 박차고 두 손을 높이 쳐들며 이렇게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조센 반자이(조선 만세)!”


기범이었다. 그는 우렁차게 만세를 부른 후, 그대로 앞좌석에 홀로 대뚝하게 서 있었다. 장내는 고요했다. 모든 시선이 기범에게 집중되었다. 학생들도 고관들도 헌병들조차도 넋 나간 표정으로 기범의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볼 뿐이었다. 그것은 무서운 폭풍을 내포한 폭발 직전의 서늘한 침묵이었다. 침몰하는 배 위에 올라탄 듯한 한없이 낭패스러운 삭막한 침묵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아주 긴 시간인 것도 같고 아주 짧은 시간인 것도 같았다. 식장의 경비를 맡고 있던 헌병들은 이윽고 긴장된 표정으로 저마다 긴 칼자루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범 이 또 한 번 소리치면 식장에서 당장에 그를 체포할 듯한 험악한 기세였다. 그런데 이때 뜻밖에도 기범의 두 팔이 다시 번쩍 머리 위로 쳐들렸다.


“닛본 반자이(일본 만세)!”


침묵은 계속되었다. 헌병들은 칼자루에 손을 댄 채 여전히 기범을 쏘아보고 있었고, 기범은 이번에도 만세 후에 여전히 앞좌석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러나 이번 침묵은 아까와는 약간 성질이 달랐다. 식장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이번에는 긴장 대신에 묘한 의문에 사로잡혔다. 서로 상반되는 입장들에 놓여 있지만 그들은 기범을 향해 똑같은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왜 조선 만세를 부른 후에 뒤따라 다시 일본 만세를 불렀는가? 너의 만세는 무슨 뜻인가? 너는 대체 어느 편인가? 그러나 이 의문도 뒤따라 곧 해답을 얻었다. 기범이 다시 두 팔을 쳐들고 제3의 만세를 외쳤기 때문이었다.


“다이토아 반자이(대동아 만세)!”


식장을 지배해 온 숨 막히던 긴장은 이 세 번째 만세로 깨끗이 해소되었다. 그는 첫 번째 만세로는 동지들의 체면을 세워 주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만세로는 동지들을 위험에서 구해 준 것이다. 나는 사건이 끝난 한참 후에야 기범이 어째서 거사의 중임을 자청했는가를 깨달았다. 그는 사전에 이미 거사가 실패할 것을 예견했고, 만일 성공할 기미를 보였다면 처음부터 거사를 실패시킬 목적이었다.


[중략 줄거리] 기범은 일규를 배신한 적이 있음에도, 일규가 그리워 그의 장례식에 나타났다. 나는 그런 기범과 대화를 나눈다.


그럴듯한 음모였지만 나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도둑놈아, 억지 쓰지 마라. 너는 파렴치범에 불과하지만 일규는 전신으로 세상을 산 놈이다. 아무리 네가 잡아 흔들어도 일규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천만에, 나는 안다. 그놈은 운 좋은 삼류 무사(武士)에 불과했다. 뽑아 본 일 없는 칼을 차고 질 수 없는 전쟁만 멋들어지게 해 온 놈이다. ㉠ 나는 세상이 가장 혼탁할 때는 일규가 어디 있는지 본 일이 없다. 그놈이 칼을 뽑았을 때는 누군가가 위기를 제거해서 세상이 더없이 편안해진 후다. 이것이 바로 무사의 허풍스런 참모습이고 무사가 너희한테 존경과 사랑 받는 소치인 것이다.”


“너는 그럼 그런 일규를 왜 허공에서 찾은 거냐? 왜 일규가 없어진 지금 살맛이 없다구 하는 거냐?” 


“세상은 주인이 필요하다, 광대 같은 주인 말이다. 무대에 누군가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 무대를 비워 둘 순 없지 않냐? 내가 일규를 필요로 하는 건 그 녀석이 무대 위에 서서 너희들이 살아가는 간판 구실을 잘 해내기 때문이다.”


“좋다, 네 쪽은 그렇다 치자. 허지만 일규 쪽에서는 왜 너를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냐?”


“무사가 칼을 차고 지나가면 그 뒤엔 그를 칭송할 악사(樂士)가 필요한 법이다. 칼이 허리에서 절그럭거려서 무사는 자기 입으로는 자찬의 노래를 읊을 수가 없다. 악사는 바로 이런 때를 대비했다가 무사의 눈짓이 날아올 때 재빨리 악기를 꺼내 황홀한 음악을 탄금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사와 악사가 서로를 경멸하면서도 사이좋게 살아가는 우정이다.”


“너는 그럼 무사 뒤에서 무슨 즐거움으로 세상을 사는 거냐?” 


“㉡ 즐거움이라고? 우리에겐 아프지 않고 배고프지 않은 것이 즐거움이다. 나는 살고 있어서, 살아남아서 고마울 뿐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에 너는 그 이상 무슨 뜻이 있다는 거냐?” 


“사람이 사는 데 그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면 사람과 동물과 대체 뭐가 다른 거냐? 네놈의 그 추잡한 행각들을 변호하기 위해 너는 너 자신의 사는 의미까지 죽일 셈이냐?” 


“네 말은 순서가 틀렸다. 사는 의미를 죽이기 위해 나는 지금까지 열심으로 살아왔다. 세상은 서 푼어치 밥이나 먹여 주고 우리한테 너무 많은 고통들을 강요한다. 너도 정신이 올바로 박혔으면 네 과거를 한번 돌아봐라. 일제시대와 대동아전쟁, 조국의 해방과 남북 분단, 6ㆍ25 사변과 동족상잔, 4ㆍ 19 의거와 5ㆍ16 혁명…… ㉢ 뭘 했냐 너는? 이때 너는 어디 있었냐? 네가 한 일이 대체 뭐냐? 우린 모두가 살아남은 게 고작이었다. 반만년 역사 동안 우리 영감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그냥 똥이나 싸고 아침저녁으로 자식들이나 만들었을 뿐이다. 36년 동안 일제하에 있으면서 이천만 동포는 무얼 한 거냐? 대체 그들이 무얼 했길래 일제가 물러가자 반민특위 (反民特委)를 조직한 거냐? 정권이 한 번씩 바뀔 때마다 엄청난 얘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권이 바뀌었을 때 비사(秘史)나 비록(秘錄)으로 공소 시효 지난 후일담으로나 나올 뿐이다. ㉣ 무수한 양심이란 것들이 그것들의 진행을 목격했지만 그것들이 진행될 동안은 누구 하나 끽소리 없었다. 그 많은 정의와 양심들은 그때는 모두 어디 틀어 박혀 있은 거냐? 이것이 바로 네가 말하는 그 고결하고 존경 받을 만한 ‘의의 있는 삶’이라는 거냐? 우리는 악사다. 재산이라고는 아주 잘 트인 목청 하나밖에 가진 것이 없다. ㉤무사님들이 작업을 하실 때 우리는 뒷전에서 잘한다, 옳소 하고 소리나 쳐주면 되는 거다. 배고프지 않고 아프지만 않으면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사는 즐거움인 것이다.”


― 홍성원, 「무사와 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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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돕는 문항과 <보기>


39. 윗글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서술자를 교체하여 사건을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② 공간 묘사를 통해 인물의 성격 변화 과정을 드러내고 있다. 

작중 인물이 서술자가 되어[각주:1] 인물의 말과 행동을 제시[각주:2]하고 있다.[각주:3]

④ 독백과 대화의 반복적 교차로 인물의 내면 갈등을 드러내고 있다.

동시에 일어난 두 개의 사건을 병치[각주:4]하여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다.



40. <보기>는 사건을 정리한 것이다.

<보기> 



42. <보기>

<보기> 위 작품에는 정의의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침묵하다가 뒤늦게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이념을 따르기보다는 생활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지식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작가는 역사적 상황에서 현실 참여에 적극적이지 못한 이들의 무책임한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1. 1인칭 시점. [본문으로]
  2. 관찰자 시점. [본문으로]
  3. 작중 인물 ‘나’가 ‘기범’이라는 인물의 행적과 대화를 중심으로 그의 말과 행동을 서술하고 있 다. [본문으로]
  4. 중요한 문학 개념어.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