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부분의 줄거리] ‘나’는 너우네 아저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 전쟁 때 자식 대신 성표를 데리고 피난했던 너우네 아저씨를 떠올린다.


밤새도록 반짝반짝 닦은 크고 작은 자물쇠를 앞뒤로 주렁주렁 달고 장군처럼 거만하고 당당하게 장사를 나가는 너우네 아저씨의 권위는 완벽했다. 내 자식을 사지에 뿌리치고 조카자식을 구해 내서 공부시킨다는 게 그렇게 위대한 일일까? 나는 그의 당당함에 압도된 채, 속으론 ‘언제고 그의 위 대성이 터무니없는 가짜라는 걸 보고 말 테다’라는 엉큼한 생각을 키우고 있었다.


휴전이 되었지만 우린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38 이남이었기 때문에 꼭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던 우리는 하필 우리 고향 쪽에서 남으로 쳐진 휴전선이 억울하고 원망스러웠다.


너우네 아저씨인들 그때 이별이 영이별 될 줄만 알았으면 설마 지게에 은표 대신 성표를 올려놓지는 않았으련만……. 형과 나는 고향을 아주 잃은 비감 때문에 이렇게 너우네 아저씨의 처사를 인간적으로 해석하려 들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너우네 아저씨는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장조카를 구했노라고 으스댔다. 장조카를 공부시킬 위대한 사명을 띤 그의 행상이 조그만 점포로 발전할 무렵 우리도 생활이 좀 나아져서 딴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됐다. 그러나 자주 소식을 주고받았고, 만날 기회도 심심찮게 있었다.


1년에 두 번 있는 동향인의 군민회도 우리 식구가 모두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참석하는 즐거운 모임이었지만 너우네 아저씨네도 꼭 숙질이 함께 참석했다. 또 실향민끼리의 의리라는 것도 각별해서 고향 땅에선 서로 모르고 지냈던 사이끼리도 경조사를 서로 연락하고 적극 참석했다.


결혼식장 같은 데서 가끔 만나는 너우네 아저씨는 성표를 대동할 적도 있었고 혼자일 적도 있었다. 물론 앞뒤에 자물쇠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던 왕년의 행상 티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내 눈엔 언제나 그가 자물쇠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제 자식을 모질게 뿌리치고 장조카를 데리고 나와 성공시키기 위해 온갖 고생 다 했다는 걸로 자신을 빛내려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자물쇠 행상일 적에 매일 밤 그것을 닦아 훈장처럼 빛냈듯이, 요새도 매일 밤 자신의 내력을 번쩍 번쩍 빛나게 닦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특이한 내력으로 어디서나 빛났다. 동향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나잇살이나 먹은 이들은 그의 자랑을 끝까지 들어 주고 아낌없이 그를 칭송하고 존경하는 걸로 자신의 도덕적인 결함까지 은폐하려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은표 어머니의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잊지 못하는 한 그의 위대성이 가짜라는 게 드러나 그가 웃음거리가 되는 걸 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단념할 수 없었다. 동향인의 결혼식도 잦았지만 장례식도 잦아졌다. 동향인이 모이는 자리에도 세대교체 현상이 나타나 나잇살이나 먹은 이들이 점점 줄었다. 너우네 아저씨의 자랑을 들어 주고 칭송할 사람도 그만큼 줄었다. 자신의 내력이 더 이상 자신을 빛내 줄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너우네 아저씨는 눈에 띄게 풀이 죽어 갔다. 나는 그런 허점을 놓칠세라 젊은 사람들한테 그가 한 짓을 풍겼다. 젊은이들의 반응은 노인들의 반응과 판이했다. 우린 이미 너우네 아저씨가 신봉하던 케케묵은 도덕과 상관없는 세대였다. 그건 한낱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웃음거리라면 너우네 아저씨는 더 큰 웃음거리였다. 좀 더 생각이 깊은 젊은이라면 너우네 아저씨가 자기 처자식에게 저지른 비인간적인 처사에 분개해 마지않았고, 그를 숫제 징그러운 괴물 취급하려 들었다.


(중략)


“에구머니, 이제 죽을 날이 정말 가까웠나 봐. 곡기 끊으면 죽는다는데…….” 


아주머니가 경망스럽게 숟갈을 내던지며 놀랐다. 그러나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런다는 확신을 얻고, 그의 경련 치는 손을 잡고 애타게 외쳤다.


“아저씨, 너우네 아저씨,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네, 너우네 아저씨, 뭐라고 말씀 좀 해 보세요.” 


이윽고 아저씨의 손에 힘이 쥐어지는 듯하더니 입놀림이 확실해졌다. 나는 그의 멍청하던 눈에 그윽한 환희가 어리는 걸 똑똑히 보았고 그의 입이 말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은표야, 아아, 은표야.”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아저씨가 그의 아들을 뿌리치고 대신 조카를 데리고 피난 내려온 뒤 한 번도 아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걸 들은 적이 없었다. 은표의 단짝이었던 나를 보면 은표도 어느 하늘 밑에 죽지 않고 살았으면 저만할 텐데 하고 비감하는 눈치라도 보일 법한데 그런 적조차 없었다. 그는 아들을 뿌리침과 동시에 아들의 이름까지 잊어버렸을 뿐더러 아예 기억에서 지우고 사는 사람 같았다. 아들 대신 장조카 데리고 피난 나왔다고 자랑할 때의 아들도 보통 명사로서의 아들이지 은표라는 고유 명사로서의 아들이 아니었다.


그가 처음으로 입에 올린 은표 소리는 나만 겨우 알아들을 만큼 희미했다. 그러나 내 귀엔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로 들렸다. 그는 사력을 다해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아, 30여 년 전 은표 어머니의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는 이제야 앙갚음을 완수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되길 오랫동안 바라고 기다려 왔을 터인데도 쾌감보다는 허망감에 소스라쳤다.


다시 열쇠고리 장수가 늘어선 거리로 나왔을 땐 해가 뉘엿뉘엿했다. 해가 뉘엿뉘엿할 무렵이면 가슴에 하나 가득 갖가지 자물쇠를 늘인 채 봉지쌀과 자반고등어를 사들고 뒤뚱뒤뚱 걸어오던 너우네 아저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봉지쌀과 자반고등어 때문인지 자물쇠가 훈장으로 보이는 엉뚱한 착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외롭고 초라한 자물쇠 장수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직시할 수 있기까지 자그마치 서른두 해가 걸렸던 것이다.


― 박완서, 「아저씨의 훈장」


Photo by Robert Bye on Unsplash





이해를 돕는 문항

36. <보기>를 바탕으로 윗글을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3점]


<보기> 「아저씨의 훈장」은 가부장적 세계관과 사회적 평가에 사로잡혀 속박된 삶을 산 인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작품 속 인물은 자신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 믿음을 실천하며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인정을 받고자 한다. 하지만 시대 흐름에 따라 세대가 교체되면서 사회적 평가가 달라지는 양상을 보인다. 아울러 작가는 인물들의 삶을 바탕으로 한국 전쟁으로 인한 분단의 문제까지 함께 조명하고 있다.


① ‘형’과 ‘나’가 고향을 잃은 비감을 느끼는 모습에서 한국 전쟁으로 인한 분단의 슬픔을 엿볼 수 있군. 

② ‘너우네 아저씨’를 비웃는 ‘젊은이들’의 모습에서 기존 세대에서 인정받던 믿음이 달라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군. 

③ ‘나’는 풀이 죽어가는 ‘너우네 아저씨’의 모습을 시대에 따라 달라진 사회적 평가를 지각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군.[각주:1]

④ ‘너우네 아저씨’를 칭송하는 ‘노인들’의 모습에서 가부장적 세계관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군. 

⑤ ‘나’는 ‘너우네 아저씨’가 장조카를 통해 자신을 빛내려 하는 모습을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모습으로 보고 있군.

  1. ‘너우네 아저씨’가 눈에 띄게 풀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실향민의 세대교체에 따라 더 이상 자신의 내력을 들어주거나 칭송해줄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