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부분의 줄거리] 눈 덮인 밤길을 억구와 큰 키의 사내(형사)가 동행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억구가 6·25 때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득칠을 우연히 만나 술자리 끝에 그를 살해하고, 부친의 산소 곁에서 죽을 심산으로 고향으로 가는 길임이 드러난다.



옆 산 소나무 위에 얹혔던 눈무더기가 쏴르르 쏟아져 내렸다. 마치 자기 무게를 그렇게 나약한 소나뭇가지 위에선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듯이……. 그때 좀 먼 곳에서 뚝 우지끈 소나 뭇가지 부러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이때 억구가 느닷없이 키 큰 사내의 앞을 막아 서며, 


“선생, 난 득수 동생놈을, 그 김득칠일 어제 죽였단 말이오. 이렇게 온통 눈이 내리는데 그까짓 걸 숨겨 뭘 하겠소. 선생은 아주 추악한, 사람을 몇씩이나 죽인 무서운 놈과 함께 서 있는 거유. 자, 날 어떻게 하겠수?” 


그러면서 한 걸음 큰 키의 사내 앞으로 다가섰다.


㉠ 큰 키의 사내는 후딱 몇 걸음 물러서며 오버 주머니에 오른손을 잽싸게 넣었다.


그의 시선은 억구가 양복 윗주머니의 불룩한 것을 움켜쥐고 있는 것에 머물러 있었다.


“아까두 말했지만, 그 술집에서 난 놈에게 이주걱댔죠. 그래 자넨 분명 우리 아버질 잡았것다? ㉡ 그래 벌초를 매년 해왔다구? 아 고마워, 고마워…… 하고 말입네다. 헌데 그 득칠일 난 그날 밤 죽이고야 만 것입니다. 글쎄, 나두 그걸 모르겠수 다. 왜 내가 그 득칠일 죽였는지…….”


여직 들어 보지 못한 맥빠진, 그렇게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큰 키의 사내는 묵묵히 억구의 얼굴을 뜯어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억구가 큰 키의 사내 앞에서 몸을 돌리며 저쪽 산등성이를 가리켜 보였다.


“바루 저 산에 가친 산소가 있답니다. 우리 조부님 산소 옆이라는군요. 난 지금 거길 가는 겁니다. 가서 우선 무덤의 눈을 쳐드려야죠. 그리구 술을 한잔 올릴랍니다. 술을 올리면서 가 친의 음성을 들을 겁니다. 올해두 눈이 퍽 내렸구나, 눈 온 짐작으루 봐선 내년두 분명 풍년이겠다만…… 하실 겁니다. 그리고 푹 한숨을 몰아쉬시겠죠. ㉢ 그 한숨 소릴 들으면서 가친 옆에 누워야죠. 이젠 가친을 혼자 버려두고 달아나진 않을 겁니다.”


그는 산으로 향한 생눈길을 몇 걸음 걷다가 다시 이쪽을 향해, 


“참, 바루 저기 보이는 저 모퉁일 돌아감 거기가 바루 와야립니다. 가셔서 우선 구장네 집을 찾아 몸을 녹이시우. 뜨끈뜨끈 한 아랫목에 푹 몸을 녹이셔. 자, 그럼 난…….”


산을 향해 생눈길을 걸어가는 그의 언 바짓가랑이가 서걱서걱 요란한 소리를 냈다.


어깨를 잔뜩 구부리고 흡사 한 마리 흰 곰처럼 산을 향해 걷는 억구의 을씨년스럽고 초라한 뒷모습에 눈을 주고 선 큰 키의 사내는 한참이나 그렇게 묵묵히 섰다가 문득 큰길 아래로 내려서서 억구 쪽으로 따라가며, 


“노―형, 잠깐!”


말소리 속에 강인한 무엇인가 깔려 있는 듯싶었다.


언 바짓가랑이를 데걱거리며 걸어가던 억구가 주춤 멈춰서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큰 키의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갔다. 오버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엇인가 움켜진 그런 자세였다.


억구가 짐짓 몸을 추스르며 자기에게로 다가서는 큰 키의 사내 거동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억구 앞에 멈춰 선 큰 키의 사내가 할 말을 잊은 듯 멍청하니 고개를 위로 향했다. 고개를 약간 젖히고 입을 헤― 벌린 채. 그의 이러한 생각하는 표정 위에 눈이 내려앉고 있었다.


――― 그날 밤 난 생물 선생네 담을 빙빙 돌고만 있었지.


내 키보다두 낮은 담이었어. 난 거푸 담을 돌고만 있었지. 만약 내가 담을 넘어 들어간다면……. 그러나 난 담을 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담이란 남이 들어오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거니까. 들어오지 말라는 걸 들어가면 그건 나쁜 짓이 니까, 그건 도둑놈이지. 난 나쁜 놈이 되는 건 싫었으니까. 무서웠던 거야. 나는 담만 돌며 생각했지. 오늘 갑자기 생물 선생넨 무서운 개를 얻어다 놓았을지도 모른다고. 또, 어쩌면 선생이 설사 나서 변소에 웅크려 앉았을지도 모른다는 지레 경계를……. 그리고 남의 담을 넘는다는 건 분명 나쁜 짓이라고……. 무서웠던 거야. 결국 난 새끼토낄 구할 생각을 거두고 담만 돌다 돌아오고 말았지.


“아니 선생, 남을 불러 놓군 왜 그렇게 하늘만 쳐다보슈?” 


억구가 말했다.


――― 나쁜 놈이 되기가 싫었던 거야. 담을 넘는다는 건…….


큰 키의 사내가 한걸음 물러섰다. 생각하는 표정을 거두지 못 한 채.


산 속 소나무 위에서 다시 눈무더기가 쏴르르 쏟아져 내렸다.


마치 그 연약한 나뭇가지 위에선, 그리고 거푸 내려 쌓이고 있는 눈의 무게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듯.


억구가 다시 다그쳤다.


“선생, 발이 시립니다. 내가 여기 얼어붙어야 좋겠소? 원 별 양반도……. 자, 그럼…….”


억구가 다시 몸을 돌려 산을 향했다. ㉣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그의 깡똥한 양복 윗주머니에 삐죽하니 2홉들이 소주병 노란 덮개가 드러나 보였다.


순간 망설이던 큰 키의 사내 얼굴에 어떤 결의의 빛이 스쳤다. 


“아, 노형, 잠깐!”


억구가 바짓가랑이를 데걱거리며 다시 몸을 돌렸다.


순간 큰 키의 사내는 오른쪽 오버 주머니에서 서서히 손을 뺐다. 그리고 무엇인가 불쑥 억구 앞으로 내밀었다.


――― 나는 담만 돌았지. 무서웠던 거야.


“이걸 나한테 주시는 겁니까?” 


억구가 물었다.


“예, 드리는 겁니다. 아까 두 개비를 피웠으니까 꼭 열여덟 개비가 남아 있을 겁니다. 눈이 이렇게 많이 왔으니 올핸 담배도 풍년이겠죠. 그러나 제가 지금 드린 담배는 하루에 꼭 한 개씩만 피우셔야 합니다.”


㉤ 큰 키의 사내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담배 한 갑을 받아 든 채 멍청히 서 있는 억구에게서 몸을 돌려 마치 눈에 홀린 사람처럼 비척비척 큰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잔기침을 몇 번 큿큿 하면서.


걸어가는 그의 등뒤로 마치 울음 같은 억구의 외침이 따랐다. 


“하루에 꼭 한 개씩 피우라구요? 꼭, 한 개씩, 피, 우, 라, 구 요?” 


그러면서 그는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ㅎ ㅎ ㅎ ㅎ ㅎ ㅎ ㅎ…….


눈 덮인 산 속, 아직 눈 조용히 비껴 내리고 있는 밤이었다.


― 전상국, 「동행」


Photo by Warren Wong on Unsplash





이해에 도움이 될 문항들.


35. <보기>와 [A]를 참고하여 ‘큰 키의 사내’에 대해 이해한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보기> ‘큰 키의 사내’는 학창 시절에 새끼 토끼를 잡게 된다. 생물 선생은 그 새끼 토끼를 다음날 해부하고 고기는 술안주로 삼겠다고 하였다. 그날 밤, 새끼 토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들던 어미 토끼의 눈과 끔찍하게 해부될 새끼 토끼를 떠올리던 ‘큰 키의 사내’는 고민 끝에 새끼 토끼를 구하러 가지만 생물 선생네 담을 넘지 못해 새끼 토끼를 구할 수 없었다.

② ‘억구’를 ‘새끼 토끼’와 동일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37. <보기>를 참고하여 윗글을 감상한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3점]

<보기> 「동행」은 동일한 여정 속의 두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쟁이 남긴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과 우연히 그를 만나 눈길을 동행하게 되는 인물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들을 통해 작가는 전쟁이 남긴 아픔을 치유하는 인간애를 보이고 있다.

④ ‘큰 키의 사내’가 ‘억구’에게 담배를 하루에 한 개씩만 피우라고 당부하는 모습에서 따뜻한 인간애를 엿볼 수 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