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부분의 줄거리] 동림산업은 제복을 제정하려고 준비위원회를 통해 사원들의 의견을 듣기로 한다. 사원들은 반대하지만 준비위원회는 일방적으로 제복 제정을 결정하고, 회사는 재단사를 불러 사원들의 치수를 재며 제복 도입을 강행한다.


“거기 있을 줄 알았지. 나야, 장이야. 우기환이도 같이 있나?” 


전화를 받자마자 장상태가 낮고 빠른 말씨로 지껄여왔다. 


“즉각 들어와 줘야겠어. 과장이 잔뜩 뿔따구가 나갖구 방금 사장실로 들어갔어.”


“재단사들은 다 철수했나?” 


“아직 다른 사무실을 돌고 있어. 그 친구들이 철수하기 전에 자네가 들어와야 일이 무사해질 것 같애.”


“지금은 들어가고 싶잖아. 친구가 찾아와서 잠깐 외출했다고 그래.”


“재는 거야 상관없잖아. ㉠ 입고 안 입는 건 그 후의 일인데 뭘 그래.”


민도식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참 만에 민 선생을 찾는 전화가 다시 왔다.


“과장일세. 자네들이 지금 취하고 있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부르는지 알고나 그러나?” 


수화기에서 대뜸 불호령이 떨어졌다.


“자네들이 이번 일에 비협조적이란 걸 알고 있어. 뒷전으로 돌면서 불평이나 터뜨리고 다니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나?” 


과장은 계속해서 닦아세웠다.


“이 전화 끝나자마자 사장실로 가봐! 나하곤 이미 용무가 끝났어!”


사장은 전혀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들어와서 맞은편 소파에 앉는 두 사원을 응접세트 너머로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들이 의복에 관해서 일가견을 가졌다는 소문인데, 어디 그 견해 좀 듣세나.”


(중략)


“자네들이 이러지 않아도 난 지금 복잡한 일이 많은 사람이야. 우 군이 K직물을 동경하는 그 심정은 나도 알아. 하지만 앞으로 가까운 장래에 다른 사람들이 자네들을 동경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나도 노력하고 자네들도 적극 협조해야 되 잖겠나. 그동안을 못 참아서 협조할 수 없다면 별 수 없지. ㉡ 이런 일엔 누군가 한 사람쯤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각오해야 돼.”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희생이 되죠. 피고용자한테도 권리는 있습니다. 들어올 때는 제 맘대로 못 들어오지만 나갈 때는 제 맘대로 나갈 수 있으니까요.”


우기환이가 분연히 소파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도어를 향해 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사장실을 나서는 우기환이와 엇갈려 웬 사내가 잽싸게 뛰어들었다. 다방에서 두 번 본 적이 있는 생산부의 잡역부 권 씨였다. 사장실로 들어서기 무섭게 권 씨는 민도식을 향해 눈자위를 하얗게 부릅떠 보였다. 우기환의 돌연한 행동에 초벌 놀랐던 도식은 권 씨의 험악한 표정에 재벌 놀라면서 엉거주춤 궁둥이를 들었다. 빨리 자리를 비켜달라는 권 씨의 무언의 협박이 빗발치고 있었다.


“㉢ 죄송해요, 사장님. 한사코 안 된다는데두 부득부득 우기면 서 이 사람이…….”


뒤쫓아 들어온 여비서를 손짓으로 내보낸 다음 사장이 말했다. 


“어서 오게, 권 군.”


자기보다 더 사정이 절박한 사람을 위해서 민도식은 사장실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생각해서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하게.”


도어가 채 닫히기 전에 사장의 껄껄한 목소리가 도식의 등 뒤에 따라붙었다.



영화, '아이, 로봇' 중에서.




“장 선생 집에 전화 걸었더니 부인이 받데요. 새로 맞춘 유니폼 입구 아침 일찍 출근했다구요.”


아내의 바가지 긁는 소리로 창업 기념일의 아침은 시작되었다. 체육대회가 열리는 제1공장까지 가자면 다른 날보다 더 일찍 나서야 되는데도 여전히 뭉그적거리고만 있는 남편 곁에서 아내는 시종 근심스런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제복 때문에 총각 사원 하나가 사표를 던졌다는 소문을 아내는 믿지 않았다. 사표를 제출한 게 아니라 강제로 모가지가 잘린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까짓것 난 필요 없어. 거기 아니면 밥 빌어먹을 데 없는 줄 알아? 세상엔 아직도 유니폼 안 입는 회사가 수두룩하단 말야!”


거듭되는 재촉에 이렇게 큰소리로 대거리는 했지만 결국 민도식은 뒤늦게나마 집을 나서고 말았다.


시내를 멀리 벗어나서 교외에 널찍하게 자리 잡은 제1공장 앞에 당도했을 때는 벌써 개회식이 시작된 뒤였다. 공장 정문 철책 너머로 검정 곤색 일색의 운동장을 넘어다보는 순간 민도식은 갑자기 숨이 턱 막혀옴을 느꼈다.




― 윤흥길, 「날개 또는 수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