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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고향이 그립다는 것이지? 작자는 나로서는 생전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시골에서 올라와서 서울을 빙빙 돌아다니며 사는 놈인데 그리고 보니 작자의 저 광증에 가까운 생활 태도는 무전 여행자의 그것 아니면 촌놈이 서울에 와 보니 모든 게 신기하기만 해서 어쩔 줄을 몰라, 아니 무턱대고 우쭐대고 싶은 저 촌뜨기 의식에 가득 차서 괜히 심각한 체해 보았다가 시시하게 웃어 보았다가 술 사달라고 조르고 사랑이 어쩌고 하고 있는 게 분명한 것이다. 고향이 그립다는 것이지? 그러나 고향이 그리운 것 같지도 않다. 작자의 고향에는 자기의 어머니와 누이가 살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만 작자는 그들에게 대해서 별 애착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 것이다. 나는 작자에게 보낸 그의 어머니의 편지를 한번 읽은 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세상에서 그처럼 다정하고 착하고 그리고 내가 그 편지 속에서 받은 느낌을 상상해 보건대 그처럼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어머니가 좀처럼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성모 마리아의 하얀 석상을 볼 때 받는 느낌 같았다고나 할까, 요컨대 작자에게는 분에 넘치기 짝이 없이 훌륭한 어머니인 것이다.


‘아들아, 먼 곳에 너를 보내 놓고 마음 한시도 놓지 못하고 있다. 하느님께 기도 드리면 내 아들이 아무리 먼 곳에 가 있더라도 심신 평안하다 하여 지난 주일부터는 읍내에 있는 성당에 다니기로 하였다. 어느 곳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


내가 읽은 그의 어머니의 편지 한 구절이다.


내가 그 편지를 읽고 있는 동안에 작자는, 우리 마을에서 성당이 있는 읍내까지는 꼬박 30리 길인데… 왕복 60리, … 미친 짓하고 계셔, 라고 투덜대더니 괜히 화가 나가지고 내가 그 편 지를 돌려주자 북북 찢어서 팽개쳐 버리는 것이었다. 그처럼 착한 어머니께 ‘미친’이라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는 그야말로 미친 바보, 멍텅구리, 촌놈, 얼치기, 치한.




(나)


누이는 도시에서의 이야기를 나와 어머니의 간절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한마디 하려 들지 않았었다. 우리는 누이가 지니고 왔던 작은 보따리를 헤쳐 보았다. 그러나 헌 옷 몇 벌과 두어 가지의 화장 도구를 발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걸로써는 누이에게 침묵을 만들어 준 이 년의 내용을 측량해 볼 길이 없었다. 누이의 침묵은 무엇엔가의 항거의 표시였다. 우리를 향한 항거였을까, 도시를 향한 항거였을까. 그렇지만 우리를 향한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누이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높은 목소리로 질책하는 방법이 침묵의 질책보다 더 서툴렀다는 것을 결국 도시에서 배워 왔단 말인가?


반대로, 도시를 향한 항거라면 ― 아마 틀림없이 이것인 모양이었는데 ― 그렇다면 누이의 저 향수와 고독을 발산 하는 눈빛, 사람들이 ⓐ 두고 온 것들에게 보내는 마음의 등불 같은 저 눈빛을 우리는 무엇으로써 설명해야 할 것인가?


누이가 돌아오고, 누이가 도시에서의 기억을 망각하려고 애쓰는 듯한 침묵 속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 우리는 아마 누이가 도시에서 묻혀온 고독이 병균처럼 우리 자신들조차 침식시켜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 황혼과 이 해풍. 그들이 우리에게 알기를 강요하던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미소를 침묵으로 바꾸어 놓는, 요컨대 우리가 만족해 있던 것을 그 반대로 치환시켜 버리는 세계였던 것인가. 누이는 적어도 우리가 보낼 때에는, 훈련을 받기 위해서 그곳에 간 것이 아니라 완성되기 위해서 간 것이었다. 그런데 침묵의 훈련만을 받고 돌아오다니.


어제 저녁, 어머니는 당신이 우리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표시로 되어 있는 밀국수를 끓여서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 가장 부드러운 말씨와 정성어린 손짓으로 누이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도시에서 무슨 일을 했던가, 결국 곤란을 겪었던가, 무엇이 재미있었던가, 남자를 사귀었던 가, 그렇다면 어떤 남자였던가, 고 얘기해 주기를 간청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짐작컨대 누이의 쓰라린 추억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누이는 어머니를 붙들고 소리 없이 울었다. 석유 등잔불의 펄럭이는 빛이 그들의 그림자를 더욱 쓸쓸해 보이게 했다. ⓓ 왜 저를 태어나게 했어요, 라고 누이는 말했다. 어머니도 소리 없이 울었다. 누이는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새삼스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요, 어머니, 라고 누이는 말하고 싶었던 거다. 하루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무서운 사건이 세계의 은밀한 곳에서 벌어지고 그리고 다음날은 희생자들이 작은 조각에 몸을 기대고 자기들의 괴로움을 울며 부유하는 것이다.


강물이 빠르게 밀려오고 금빛 하늘이 점점 회색으로 변해 가는 이 시각에 아직도 신비한 힘을 보여 주는 자연 속에서 나는 누이로 하여금 도시의 모든 기억을 토해 버리게 할 생각이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누이를 위해서였다. 이 년 동안을 씻어 버리고 다시 이 짠 냄새만을 싣고 오는 해풍으로 목욕시키고 싶었다. 인간이란 뭐냐, 인간이란? 저 도시가 침범해 오지 않는 한, 우리는 한 고장을 지키기에 충분한 만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영원의 토대를 만든다는 것, 의지의 신화들을 배운다는 것, 우는 것을 배운다는 것, 침묵을 배운다는 것, 그것만이 인간인 것이냐? 인간의 허영이 아닌가, 라고 나는 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 김승옥,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선생님의 설명] 

(가)와 (나)는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장들의 일부로, 각각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파악할 수 있습니다.


  • (가)의 ‘나’는, 고향에 어머니와 누이를 두고 서울로 와 살고 있는 ‘작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 (나)의 ‘나’는,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2년간 살다 귀향한 ‘누이’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가)와 (나)는 ‘작자’와 ‘누이’, 즉 고향을 떠나 도시 공간을 경험하고 있거나 경험한 인물을 다룸으로써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가)와 (나)는 독립된 장으로 서로 구별되어 있음에도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라는 단일 제목 하에서 통합된 의미를 구현하게 되지요. 이 작품을 읽으며 독자는, (가)에서 ‘나’의 시각으로 서술되는 ‘작자’의 모습을 통해 (나)의 [ ㉠ ]을 / 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