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젊은 시절에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면서 “나의 조국을 알기 위해서 이탈리아로 가노라.” 하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외국어를 통해서 한국어에 없는 문법 장치를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언어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이 때로는 한국어의 고유성에 대한 재확인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철수가 축구를 하였다.”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이 문장으로는 화자가 ‘철수가 축구한 것’을 직접 보았는지 아니면 남으로부터 들었는지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콜롬비아의 토속어인 투유카 어에서는 이것을 명확하게 구별하는 장치가 있다. 화자의 목격 여부가 동사에 형태적으로 표시 되는데 그것을 ‘증거법’이라고 부른다.


díiga apéwi (그가 축구한 것을 내가 보았다.)
díiga apéti (그가 축구한 것을 내가 소문은 들었지만 보지 못했다.

díiga apéyi (그가 축구한 것을 내가 알지만 보지는 못했다.)
díiga apéyigi (그가 축구한 것을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díiga apéhiyi (그가 축구한 것을 나는 짐작했다.)


◦ 증거법의 구성 요소 = {wi=시각적, ti=비시각적, yi=명백함, yigi=전해 들음, hiyi=짐작함}

위 예문들의 공통 의미는 ‘그가 축구를 하였다’이다. 그런데 투유카 어의 문장으로 이 의미만을 표현할 수는 없다. 투유카 어는 증거법의 형태들이 문장에 필수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어에는 증거법이라는 문법 범주가 없으므로 이러한 내용을 한국어로 표현하기 위해서 문법 형태들을 사용할 수가 없다. 단어나 문장 등 다른 차원의 언어적 장치에 의해서 이러한 것들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한국어로 사실을 표현하는 방식과 투유카 어의 그것이 다름을 보여 준다.


그러면 한국어는 어떠한가? 한국어의 특성을 잘 드러내는 것은 ‘높임법’이 다. “준비를 하십시오.”라는 말에는 ‘화자가 청자를 높이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 있다. 한국어 화자들이 말을 할 때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묵시적인 질문에 답해야만 한다. ‘당신은 청자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듣는 사람을 높입니까? 아니면 높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고민이 우리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높임법을 보편적인 언어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외국어는 자국어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는 언어 간의 대조나 비교를 통하여 자신의 사고 방식을 돌이켜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투유카 어의 증거법을 이해한 한국인들은 문장 속 동사의 역할에 대해서 한국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차원의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산업화의 정도나 사용 인구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나름대로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토착민의 언어든 문명국의 언어든 서로 존중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언어들의 특징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언어의 그림’을 보다 객관적으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