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섭의 '국어학 개설' 책 표지 그림.


어떤 지역이 언어적으로 분화하여 그 지역 안에 각각 다른 언어 특징을 지닌 소지역들이 있다면 그 지역을 몇 갈래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처럼 어떤 지역을 언어 차에 의해 나누는 것을 방언구획이라고 하며, 이러한 방언구획에 의해 나누어진 각 지역을 방언권이라 한다. 그리고 방언권들 사이의 경계를 방언경계라고 한다.


방언경계 지역에는 무지개에 색깔이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두 방언권의 언어 특징들이 뒤섞여 나타나는 접촉지대가 있는데, 이를 전이지대(轉移地帶) 또는 전이지역(轉移地域)이라고 한다. 가령 벼를 한 방언권에서는 ‘베’라 하고 그 이웃 방언권에서는 ‘나락’이라고 할 때, 전이지대에서는 ‘베’와 ‘나락’이 거의 같은 세력으로 뒤섞여 쓰인다. 그곳에서 한 쪽으로 가면 점차 ‘베’의 세력이 커지다가 드디어 ‘베’만 쓰이는 지역이 나오고, 그 반대쪽으로 가면 ‘나락’의 세력이 커지다가 마찬가지로 ‘나락’만 쓰는 지역이 나온다.


그런데 전이지대에서는 독특한 의미 분화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베’와 ‘나락’이 다 쓰일 때 ‘베’는 논에 있을 때의 벼를 가리킴에 반해 ‘나락’은 볏단에서 턴 다음의 벼만을 가리키는 따위의 의미 분화가 그것이다. 이것은 ‘베’와 ‘나락’이 비록 형태는 달라도 그 의미는 같던 것과는 다른 현상으로, 전이지대에서 생기는 특이한 현상이다.


한편 지금까지 없던 새 언어 특징이 생기는 현상을 개신(改新)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어느 지역에서나 ‘춥다, 춥어서, 춥으면’이라고 하였는데 어느 한 지역에서 ‘춥다, 추워서, 추우면’과 같이 말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개신이 차츰 세력이 커지면 ‘춥어서[추버서]’ 대신 ‘추워서’라고 말하는 지역이 점차 넓어진다. 이때 개신의 확장이 마치 물결의 퍼짐과 비슷하다고 하여 개신파(改新波)라고 하며, 세력의 크기에 따라 개신파의 크기가 달라진다. 그리고 개신이 시작된 곳을 방사(放射)의 중심지, 이 중심지 주변을 초점지역이라 한다. 이때의 전이지대는 개신파의 끝쪽과 이것을 저지하는 저항선이 뒤엉킨 지대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사회·문화적 요인에 의해 개신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므로, 개신파가 서로 충돌하는 전이지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험준한 산이나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과 같이 지리적 요인에 의해 두 세력의 싸움에 휩쓸리지 않는 지역이 생기는 수도 있다. 이와 같이 ㉠개신파의 침해를 받지 않는 지역을 잔재지역(殘滓地域)이라 한다. 잔재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고어형(古語形)을 많이 간직하고 있으므로 방언 연구 및 고어 연구에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 이익섭, <국어학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