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문학/현대운문 (15)

문학/현대운문

문태준, 「평상이 있는 국숫집」(2017, 고2, 9월)

평상이 있는 국숫집에 갔다 ㉢ 붐비는 국숫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 세월 넘어온 친정 오빠를 서로 만난 것 같다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 손이 손을 잡는 말눈이 눈을 쓸어주는 말병실에서 온 사람도 있다 식당 일을 손 놓고 온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 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 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 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 ― 문태준, 「평상이 있는 국숫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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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2017, 고2, 9월)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 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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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림,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2017, 고2, 11월)*

어려서 나는 램프불 밑에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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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림, 「추억」(2017, 고2, 11월)*

종다리 뜨는 아침 언덕 우에 구름을 쫓아 달리던 너와 나는 그날 꿈 많은 소년이었다.제비 같은 이야기는 바다 건너로만 날리었고 가벼운 날개 밑에 머-ㄹ리 수평선이 층계처럼 낮더라. 자주 투기는 팔매는 바다의 가슴에 화살처럼 박히고 지칠 줄 모르는 마음은 단애(斷崖)의 허리에 게으른 갈매기 울음소리를 비웃었다. 오늘 얼음처럼 싸늘한 노을이 뜨는 바다의 언덕을 오르는 두 놈의 봉해진 입술에는 바다 건너 이야기가 없고. 곰팽이처럼 얼룩진 수염이 코밑에 미운 너와 나는 또다시 가슴이 둥근 소년일 수 없고나. ― 김기림, 「추억」 이해를 돕는 문항들 21. (가) ~ (다)의 공통점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① 직유법을 활용하여 대상을 구체화하고 있다.② 점층적인 방식을 사용하여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③ 영탄적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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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 「다시 밝은 날에 - 춘향의 말 2」(2018, 고2, 11월)

신령님……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랑이 같었습니다 번쩍이는 비눌을 단 고기들이 헤염치는 초록의 강 물결 어우러져 날으는 애기 구름 같었습니다 신령님…… 그러나 그의 모습으로 어느 날 당신이 내게 오셨을 때 나는 미친 회오리바람이 되였습니다 쏟아져 내리는 벼랑의 폭포 쏟아져 내리는 쏘내기비가 되였습니다 그러나 신령님…… 바닷물이 적은 여울을 마시듯이 당신은 다시 그를 데려가고 그 훠―ㄴ한 내 마음에 마지막 타는 저녁 노을을 두셨습니다 그러고는 또 기인 밤을 두셨습니다 신령님…… 그리하여 또 한번 내 위에 밝는 날 이제 산골에 피어나는 도라지꽃 같은 내 마음의 빛갈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 서정주, 「다시 밝은 날에 - 춘향의 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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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수권, 「까치밥」(2018, 고2, 9월)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서울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 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 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 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 철없는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사랑방 말쿠지에 짚신 몇 죽 걸어놓고 할아버지는 무덤 속을 걸어가시지 않았느냐 그 짚신 더러는 외로운 길손의 길보시가 되고 한밤중 동네 개 컹컹 짖어 그 짚신 짊어지고 아버지는 다시 새벽 두만강 국경을 넘기도 하였느니 아이들아, 수많은 기다림의 세월 그러니 서러워하지도 말아라 눈 속에 익은 까치밥 몇 개가 겨울 하늘에 떠서 아직도 너희들이 가야 할 머나먼 길 이렇게 등 따숩게 비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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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수라(修羅)」(2018, 고2, 9월)*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모 생각 없이 문 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 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 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 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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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못 위의 잠」(2018, 고2, 6월)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 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 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 묻은 ㉢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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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2018, 고2, 6월)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함께 출제된 지문 우리는 시를 통해 삶 속의 다양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는 특정 시대나 사회, 혹은 특정 계층을 대표할 만한 인 물들이 있는데, 이런 인물을 ‘전형적 인물’이라고 한다. 시 속 전형적 인물은 두 가지 양상으로 드러난다. 어떤 시에서는 화자 자신이 전형적 인물이 되기도 하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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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길」(2019, 고2, 6월)

잃어버렸습니다.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 윤동주, 「길」 참고할 와 선택지이 시는 ‘길’이라는 상징적 소재를 통해 ‘잃어버린 나’를 되찾으려는 화자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시의 화자는 부정적 상황 속에서 자기 탐색과 성찰을 통해, ‘잃어버린 나’를 회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① 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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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부, 「산길에서」(2019, 고2, 6월)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밭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을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길 따라 그이들을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안다 ― 이성부, 「산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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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대숲바람 소리」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밤사이 내려와 놀던 초록별들의 퍼렇게 멍든 날개쭉지가 떨어져 있다.어린날 뒤울안에서 매 맞고 혼자 숨어 울던 눈물의 찌꺼기가 비칠비칠 아직도 거기 남아 빛나고 있다. 심청이네집 심청이 빌어먹으러 나가고 심봉사 혼자 앉아 날무처럼 끄들끄들 졸고 있는 툇마루 끝에 개다리소반 위 비인 상사발에 마음만 부자로 쌓여주던 그 햇살이 다시 눈 트고 있다, 다시 눈 트고 있다. 장 승상네 참대밭의 우레 소리도 다시 무너져서 내게로 달려오고 있다.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내 어린날 여름냇가에서 손바닥 벌려 잡다 놓쳐버린 벌거벗은 햇살의 그 반쪽이 앞질러 달려와서 기다리며 저 혼자 심심해 반짝이고 있다.저 혼자 심심해 물구나무 서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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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악, 「하늘만 곱구나」(2019, 고2, 3월)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두 손 오구려 혹 혹 입김 불며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아마 하늘이기 혼자만 곱구나 거북네는 만주서 왔단다 두터운 얼음장과 거센 바람 속을 세월은 흘러 거북이는 만주서 나고 할배는 만주에 묻히고 세월이 무심찮아 봄을 본다고 쫓겨서 울면서 가던 길 돌아왔단다 띠팡을 떠날 때 강을 건늘 때 조선으로 돌아가면 빼앗겼던 땅에서 농사지으며 가 갸 거 겨 배운다더니 조선으로 돌아와도 집도 고향도 없고 거북이는 배추꼬리를 씹으며 달디달구나 배추꼬리를 씹으며 꺼무테테한 아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배추꼬리를 씹으며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누 첫눈 이미 내리고 이윽고 새해가 온다는데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아마 하늘이기 혼자만 곱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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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목련 전차」(2018, 고2, 3월)

목련이 도착했다 한전 부산지사 전차기지터 앞 꽃들이 조금 일찍 봄나들이를 나왔다 나도 꽃 따라 나들이나 나갈까 심하게 앓고 난 뒤의 머릿속처럼 맑게 갠 하늘 아래, 전차 구경 와서 아주 뿌리를 내렸다는 어머니 아버지도 그랬겠지 꽃양산 활짝 펴 든 며느리 따라 구경 오신 할아버지도 그랬겠지나뭇가지에 코일처럼 감기는 햇살, 저 햇살을 따라가면 나무 어딘가에 숨은 전동기가 보일는지 모른다 전차바퀴 기념물 하나만 달랑 남은 전차기지터 레일은 사라졌어도, 사라지지 않는 생명의 레일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지난밤 내리치던 천둥번개도 쩌릿쩌릿 저 코일을 따라가서 동력(動力)을 얻진 않았는지, 한 량 두 량 목련이 떠나간다 꽃들이 전차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저 꽃전차를 따라가면,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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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 「지도」(2018, 고2, 3월)

지도에서는 푸른 것을 바다라 하였고 얼룩덜룩한 것을 육지라 부르는 습관을 길러 왔단다. 이제까지 국경이 있어 본 일이 없다는 저 하늘을 닮아서 바다는 한결로 푸르고 육지가 석류껍질처럼 울긋불긋한 것은 오로지 색채를 즐긴다는 단조한 이유가 아니란다. 오늘 펴보는 이 지도에는 조선과 인도가 왜 이리 많으냐? 시방 나는 똥그란 지구가 유성처럼 화려히 떨어져 갈 날을 생각하는 ‘외로움’이 있다. 도시 지구는 한 덩이 푸른 석류였거니……. ― 신석정, 「지도」 지도는 영토와 국경의 존재를 드러내고 육지와 바다, 국가와 국가 간의 비교를 가능하게 한다. (가)는 ‘지도’, ‘지구’와 같은 지리적 표상을 다루고 구체적 장소를 제시하면서 이를 1930년대 제국주의 치하의 현실과 연결하고 있다. (가)의 화자는 지도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