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비어천가 ⓒ 위키백과


한글 창제 후 다양한 방식으로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쓰게 됨으로써 우리나라의 문자 생활사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서적의 간행에 영향을 미쳤는데, 서적을 간행 할 때에 서적의 내용과 간행 목적에 따라 예상 독자층을 상정하고 그들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쓰게 되었다.


한글 창제 직후 간행된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은 모두 한글과 한자를 섞어 표기하였다. 하지만 세 문헌은 구체적인 표기 방식에 차이가 있는데, 이는 상정한 예상 독자가 달랐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는 ‘海東六龍이 나라샤[각주:1]’에서와 같이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였다. 이것은 한자와 한문을 많이 아는 사람을 주요 독자층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월인천강지곡은 ‘솅世존尊’에서처럼 해당 한자음에 한자를 병행하여 적었고,  석보상절은 ‘世솅尊존’에서처럼 해당 한자에 한자음을 병행하여 적었다.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에는 공통적으로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발음되지 않는 한자음을 표기하려 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다.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은 한자를 아는 사람뿐만 아니라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독자층으로 상정하였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누구를 주된 독자층으로 상정하느냐에 따라 구체적인 표기 방식이 달랐다.  월인천강지곡은 한자를 잘 모르는 독자, 즉 한글 창제를 통해 새로 확보하게 될 독자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방식 으로 간행된 것이다.


앞의 세 문헌보다 후대에 간행된  두시언해와  백련초해도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쓰는 방식에 서로 차이를 보인다. 성종 때 간행된 두시언해는 두보의 한시를 한글로 번역한 책인데, ‘東녀그로 萬里예’에서 보듯 한글과 한자를 혼용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시언해가 두보의 시를 한문으로도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을 독자로 상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련초해는 원문의 시는 한자로 적고 각 한자에 한글로 음과 훈을 달았으며, 번역문은 순 한글로 적고 있다. 이는 한자를 모르는 아동을 독자로 상정하였기 때문이다. 백련초해의 번역문은 독자층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여 순 한글로만 적는 표기 방식을 채택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 '나라샤'의 'ㅏ'는 '아래 아'임.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