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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발달의 역사를 살펴보면, 문자의 모양과 필서 방법은 당시에 쓰였던 필기도구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양피지에 긁어 썼을 때의 글자 모양과 파피루스에 그려 넣었을 때의 모양, 그리고 돌기둥에 새겨 넣었을 때의 모양, 종이 위에 붓으로 썼을 때의 모양이 각각 달랐던 것은 필기도구의 변화가 글자의 형태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종이와 연필 같은 전통적인 필기도구가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로 대체되고 있다. 컴퓨터는 종래의 필기도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컴퓨터 자체가 필기도구인 동시에 필기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의 종이와 연필, 혹은 양피지와 펜으로 나뉘었던, 문자가 쓰이는 공간과 문자를 쓰는 도구와의 구분이 컴퓨터에 이르면 모호해진다. 결국 무엇을 가지고 어디에 쓴다는 식으로 필기 수단을 두 부류로 나누어 인식하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의식이 도구를 변화시킨 것인가, 아니면 도구가 의식을 변화시킨 것인가? 필기도구의 변화는 단지 글자의 모양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때로는 그 변화가 표기법이나 글쓰기의 사회적인 규범 자체를 흔들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인터넷 글쓰기에서 나타나는 규범의 혼란도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의식 변화로 나타난 현상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매체로 등장한 컴퓨터의 강력한 영향으로 생겨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인터넷 채팅 글쓰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겹받침을 생략하거나 발음대로 쓰려는 표기 방식은 특별한 의식의 반영이기보다는 컴퓨터라는 매체를 이용한 표기 방식의 한 형태이다. 쉽게 말하면, 소리 나는 대로 적어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면 굳이 쉬프트(shift) 키를 누르는 번거로운 수고를 하지 않겠다는 의도의 반영이다. 어쨌든 빨리 입력해야 하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소리 나는 대로 적으면서 축약의 형태를 즐겨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이 쓴 내용은 바로바로 상대방에게 전달되고 또 바로 회신이 오는 즉각적인 상황이므로 컴퓨터 글쓰기에서는 머뭇거릴 여유를 가질 수가 없다. 현대의 또 다른 문화인 휴대 전화 문자 메시지의 경우도 비슷한 사례이다. 한정된 액정 화면 안에 의미를 담아내야 하는 휴대 전화의 특성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의사를 되도록 짧게 표현하는 방법에 익숙해지게 하였고, 그 결과 과감하게 축약하거나 띄어쓰기에 구속되지 않는 등 자유롭게 문장을 작성하는 표기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새로운 문화적 현상을 창출하고 있는 이 현대의 언어 표기가 문제가 되는 것은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 소리 나는 대로 적다 보니 맞춤법 규범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말을 적는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표기 형태는 소리 나는 대로 적거나 이어적기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어간과 어미, 체언과 조사를 엄격하게 구별하여 적는 원칙은 음소주의나 이어적기 표기보다는 매우 의식적인 표기법이다. 그러나 ㉡근대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줄곧 끊어적기 표기를 주된 표기 원칙으로 고수하여 왔다. 현재 모든 교과서와 공식적인 출판물은 엄격한 형태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 전통적인 규범이 현대 사회에서 새로운 필기 매체를 만나 옷을 갈아입고 있는 셈이다. 결국 표기법도 그 사회의 문화적 특성과 유리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