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자하샘(다음 블로그)


1933년에 완성․발표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오늘날의 정서법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기본 정신은 세 항의 총론 중 ‘한글 맞춤법은 표준말을 그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으로써 원칙을 삼는다’는 제1항에 집약되어 있다. 이 조항은 세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 어떤 한 방언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공통적인 표준말을 맞춤법 규정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둘째 그 표준말을 되도록 발음에 충실하도록 적는다는 것, 셋째 발음에 충실한 표기가 동시에 어법에도 맞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비록 발음과 거리가 멀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어법에 맞도록 적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중 맞춤법이 표준말을 그 규정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은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맞춤법이란 전국적으로 통일되어 쓰일 표기 체계가 필요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말로 하는 표준 국어’인 표준말을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다음, ‘소리대로’ 적는다는 것은 보다 구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것은 무엇보다 역사주의를 배제하겠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1933년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표준말은 ‘현재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이라 규정되어 있는 바, 이 ‘현재’의 말의 발음을 충실히 표기하면 자연히 예부터 쓰여 오던 관습적인 표기법은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표음 문자를 쓰는 나라에서 정서법을 개정할 때 그때까지의 정서법의 전통을 살려야 되느냐 마느냐는 항상 논란이 되는데, 그 전통이 그리 길지 않았고 또 따를 만한 통일된 정서법이 없었던 우리로서는 종래의 관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어법에 맞도록’이란 조건은 좀 더 세심히 검토해야 한다. 이는 대체로 어떤 형태소의 표기를 그 기본형으로 고정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형태소는 그것이 놓이는 자리에 따라 몇 가지 다른 음으로 실현되는 일이 많다. 가령 ‘없다’의 어간 ‘없-’은 ‘-으니, -어서’와 같은 어미 앞에서는 ‘없-’으로 실현되지만, ‘-다, -지’ 앞에서는 ‘업-’, ‘-네, -는’ 앞에서는 ‘엄-’으로 실현되는 것이 그 일례다. ‘어법에 맞도록’ 적겠다는 것은 바로 이런 주위 환경에 의한 소리의 변이를 맞춤법에 반영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원칙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핵심을 이룬다고 할 만큼 그 적용 범위가 넓고 비중도 크다. 구체적으로 보면 이 원칙은 명사와 조사가 결합하는 경우와 용언이 활용하는 경우에도 적용된다. ‘잎이, 잎도, 잎만’은 전자의 예이고, ‘덮더라, 덮는다, 읽더라, 읽는다’ 등은 후자의 예이다. 그러나 불규칙 활용의 경우에는 ‘어법에 맞도록’의 원칙을 따르지 않고 ‘소리대로’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만일 ‘짓었다, 덥으니, 듣으면’ 등으로 적으면 규칙 활용의 ‘벗었다, 입으니, 믿으면’과 관련되어 잘못 읽힐 위험이 있어 취해진 방편적 조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결국 ‘어법에 맞도록’ 적겠다는 것은 시각적으로 고정된 형태를 보여 주는 것이 눈에 빨리 들어오고 그만큼 의미를 빨리 파악시키는 것이기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이 규정은 정당하고 합리적이라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소리대로’의 원칙과 ‘어법에 맞도록’이라는 원칙을 적절히 조화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 이익섭, <한글 맞춤법의 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