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1, 역사저널 그날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도덕적이고 규범적이며 사람다운 삶을 강조하는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성리학은 우주의 근원과 질서, 그리고 인간의 심성과 질서를 ‘이(理)’와 ‘기(氣)’ 두 가지를 통 해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과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성리학을 ‘이기론’ 또는 ‘이기 철학’이라고도 부른다. 성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이’는 만물에 ⓐ 내재하는 원리이고, ‘기’는 그 원리를 현실에 드러내 주는 방식과 구체적인 현실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기’를 통해서 드러난다. ‘이’는 언제 나 한결같지만 ‘기’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존재하므로, 우주 만물의 원리는 그대로지만 형체는 다양하다. 이러한 ‘이’와 ‘기’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성리학자들이 현실을 해석하고 인식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기’를 중시했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서경덕을 들 수 있다. 그는 ‘기’를 우주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서경덕에 의하면, 태초에 ‘기’가 음기와 양기가 되고, 음기와 양기가 모이고 흩어 지고를 반복하면서 하늘과 땅, 해와 달과 별, 불과 물 등의 만물이 만들어졌다. ‘기’는 어떤 외부의 원리나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여 만물을 생성하고 변하게 한다. 하지만 ‘이’는 ‘기’ 속에 있으면서 ‘기’가 작용하는 원리로 존재할 뿐 독립적으로 드러나거나 ⓑ 작용하지 않는다. 즉, ‘이’와 ‘기’는 하나이며, 세계에 드러나는 것은 ‘기’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을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 한다. 기일원론의 바탕에는, 현실 세계의 모습은 ‘기’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므로, ‘기’가 다시 움직이면 현실도 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가 깔려 있다.

 

‘이’를 중시했던 대표적인 성리학자는 이황이다. 이황은 서경덕의 논의를 단호하게 ⓒ 비판하며 ‘이’와 ‘기’는 하나가 아니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는 ‘이’를 우주 만물의 근원이자 변하지 않는 절대적 가치이며 도덕 법칙이라고 보았다. ‘이’는 하늘의 뜻, 즉 천도(天道)이며, 만물이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나는 본성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인간이 ‘이’를 깨우치고 실행하면 하 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하고, 인간 사회는 천도에 맞는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질서를 확립한다고 보았다. 현실 사회가 비도덕적이고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인간이 본성을 잃어버 리고 사악한 마음을 따르기 때문인데, 이러한 사악한 마음은 인간의 생체적 욕구, 욕망 등인 ‘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기’가 하나일 수는 없으며, 둘은 철저히 ⓓ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황의 주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이기이원론 (理氣二元論)’이라 한다. 이황은 ‘이’가 원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동* 한다고 보았다. ‘이’가 발동하면 그에 따라 ‘기’도 작용하여 인간이나 사회는 도덕적인 모습이 되지만, ‘이’가 발동하지 않고 ‘기’만 작용하면 인간이나 사회는 비도덕적 모습이 될 수 있다. 이황은 인간이 ‘이’를 깨우치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학문과 수양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현실의 문제 상황은 학문과 수양을 통해 ‘이’를 회복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한편, 이이는 서경덕과 이황의 논의가 양극단을 달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와 ‘기’의 관계를 새롭게 ⓔ 규정하였다. 이이는 ‘이’를 모든 사물의 근원적 원리로, ‘기’를 그 원리를 담는 그릇으로 보았다. 둥근 그릇에 물을 담으면 물의 모양이 둥글고 모난 그릇에 물을 담으면 물의 모양이 모나 보이지만, 그 속에 담긴 물의 속성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처럼 ‘기’는 현실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이’는 달라지지 않는다. 물이 그릇에 담겨 있지만 물과 그릇이 다른 존재이듯이, ‘이’와 ‘기’도 한 몸처럼 붙어 있지만 ‘이’와 ‘기’로 각각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이에 따르면, ‘이’는 현실에 아무 작용을 하지 않고 ‘기’만 작용한다. 현실의 모습이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면, 이는 ‘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기’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회복하기보다는 ‘기’로 나타난 현실의 모습 자체를 바꾸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 이이의 주장이다. 이이가 조선 사회의 변화를 위한 여러 가지 개혁론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사고가 바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 발동(發動) : 일어나 움직임.

 

 

― (출전) 「한국철학 콘서트」(재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