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아주 긴 때 적막한 방 안에 

어둑한 그림자 말 없는 벗이 되어 

외로운 등 심지를 태우고 전전반측(輾轉反側)하여 

밤중에 어느 잠이 빗소리에 깨어나니 

구곡간장(九曲肝腸)을 끊는 듯 째는 듯 새도록 끓인다 

하물며 맑은 바람 밝은 달 삼경(三更)이 깊어 갈 때 

동창(東窓)을 더디 닫고 외로이 앉았으니 

임의 얼굴에 비친 달이 한 빛으로 밝았으니 

반기는 진정(眞情)은 임을 본 듯하다마는 

임도 달을 보고 나를 본 듯 반기는가 

저 달을 높이 불러 물어나 보고 싶은데 

구만리장천(九萬長天)의 어느 달이 대답하리 

묻지도 못하니 눈물질 뿐이로다

어디 뉘 말이 춘풍추월(春風秋月)을 흥 많다 하던가 

어찌한 내 눈에는 다 슬퍼 보이는구나 

봄이라 이러하고 가을이라 그러하니 

옛 근심과 새 한(恨)이 첩첩이 쌓였구나 

세월이 아무리 흐른들 이내 한이 그칠까 

몇 백세(百歲) 인생이 천년의 근심을 품어 있어 

못 보는 저 임을 이토록 그리는가 

잠깐 동안 아주 잊어 후리쳐 던져두자 

운수에 정해진 만남과 이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 

언약을 굳게 믿고 기다려는 보자구나 

행복과 불행은 하늘의 이치에 자연 그러하니 

초생(初生)에 이지러진 달도 보름에 둥글듯이 

청춘에 나눈 거울 이제 아니 모을소냐 

신혼에 즐거웠거늘 오랜 옛정이 지금이라고 어떠하랴 

흰머리 속의 소년의 마음을 가져 있어 

산수(山水) 갖춘 고을에 초막(草幕)을 작게 짓고 

편안치 못한 생애를 유여(有餘)하고자 바랄소냐 

두세 이랑 돌밭을 갈거니 짓거니 

오곡이 익거든 조상 제사 받들고 성경(誠敬)을 이룬 후에 

있으면 밥이오 없으면 죽을 먹고 

좋은 일 못 보아도 궂은 일 없을지니 

오십에 아들 낳아 자손 아기 늙도록 

일생에 덜 밉던 정을 밉도록 좇으리라


― 박인로, 「상사곡(相思曲)」


Photo by Kristaps Grundsteins on Unsplash





이해를 돕는 문항

44.<보기>를 참고하여 (가)를 감상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3점]


<보기> 박인로의 「상사곡」은 이별한 임에 대한 연정의 마음을 잘 표현한 시가로서 화자를 둘러싼 배경과 자연물을 활용하여 임에 대한 간절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이별의 상황을 신의로 극복하려는 모습에서 더 나아가 안분지족의 일념으로 자신의 부정적 상황을 견디려는 선비로서의 자세를 드러낸다는 점이 특징이다.


① ‘가을밤’과 ‘적막한 방’은 화자를 둘러싼 배경으로, 임과 이별하고 외로워하는 화자의 정서와 조응되는군. 

② ‘동창’에 비친 ‘달’은 임을 떠올리게 하는 대상으로, 임에 대한 화자의 간절함을 느끼게 하는군. 

③ ‘언약’을 ‘믿고’ 기다리려는 행동은 화자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임에 대한 화자의 신의를 보여주는군. 

④ ‘초생’의 ‘달’과 ‘보름’의 달의 대비로, 임과의 재회가 어려운 화자의 부정적 상황을 강조하는군.[각주:1] 

⑤ ‘초막’과 ‘죽’은 화자의 태도와 관련된 소재로, 화자가 자신의 현실을 안분지족의 정신으로 견디려고 함을 알게 하는군.

  1. 이 부분은 이별이라는 부정적 상황이 나중에는 나아질 것이라는 화자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