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현상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방법 가운데 흔히 볼 수 있는 것에는 양분적 방법에 의한 것과 ㉠정도적 방법에 의한 것이 있다. 언어 현상을 체계화하여 기술하기 위해, 야콥슨은 어떤 언어적 자질의 있고 없음에 따라 양분하는 방법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언어학자들은 여러 언어 현상과 그 규칙을 간결하게 일반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엄격한 양분적 방법에 의한 기술은 인간의 사고를 일정한 범위와 틀 안에 묶어 두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언어 현상의 다양한 국면을 제대로 포착하기 어렵게 하였다.


국어 문장의 의미를 기술하는 데에도 이와 같은 양분적 접근만으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요청성’은 비범주적 규칙 또는 정도성으로 기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 국어에서 청자의 행동적 응답을 요구하는 문장은 일반적으로 명령문으로 범주화되어 왔는데, 이와 같은 요청성은 명령문에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의미 자질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문을 닫아 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우리는 일상의 언어생활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사용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ㄱ. 문을 닫아라.

  ㄴ. 문 좀 닫을 수 없겠니?

  ㄷ. 문을 닫자.

  ㄹ. 문을 닫아 주기 바란다.


위의 사례들을 살펴보면 명령문뿐만이 아니라 의문문, 청유문, 평서문의 경우도 단순히 의문, 청유, 서술의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쓰이는 상황에 따라서는 모두 요청성의 의미 자질을 가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생님께서 “문 좀 닫을 수 없겠니?”라고 했을 때, 그것을 긍정과 부정의 대답을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학생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문장의 의미 자질은 범주화된 문장의 형식과 그대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 각각의 문형이 가지는 요청성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 이 네 가지는 모두 화자가 청자에게 문을 닫아 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지만, 그 문장들은 강압성이나 정중성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다. ㄱ은 강압성이 가장 강하고, ㄴ은 강압적일 때와 온건할 때가 있을 수 있으며, ㄷ은 온건한 표현으로 보인다. 그리고 ㄹ은 정중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강압성과 정중성의 차이에 따라 요청성의 정도를 파악해 보면, ㄱ이 가장 강하고 ㄹ로 가면서 그 정도가 조금씩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명령문, 의문문, 청유문, 평서문이라고 부르던 모든 문장 유형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요청성의 의미 자질은 각각의 문형에서만이 아니라 통합적으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으며, 또한 그 의미 자질은 양분적인 것보다는 정도적인 방법에 의해 기술될 필요가 있다. 국어에는 이 밖에도 동의성, 반의성, 사동성, 피동성 등 범주적 규칙만으로 명쾌하게 기술하기 어려운 언어 현상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에도 비범주적이거나 정도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 박영순, ‘한국어 의미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