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소크라테스가 한 젊은이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질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질문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어떻게 해서 진리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영혼이 천상의 이데아계에서 진리를 배웠지만 지상에서 삶을 얻으면서 진리를 망각하게 되었으며, 그럼에도 진리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천상에 이데아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우리 현대인에게 소크라테스의 설명은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패러독스(paradox)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것일까.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런 패러독스에 답하는 형식으로 사색을 전개했다. 먼저 하이데거는 후설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비판했다. 후설은 세계(대상)의 의미는 주관의 의식 속에 구성된 것이며, 그렇게 해서 부여된 의미는 주관의 의식을 넘어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의식 속에 이데아적인 영역이 확보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주관적 의식 속에 이데아적인 것이 입력되어 있다는 후설의 사상에는 충분한 근거가 결여되어 있다. 이런 설명은 이데아계가 소크라테스의 천상을 대신해서 의식 안으로 이동한 것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 자체에 주목했다. 그리고 인간을, 후설의 경우처럼 세계(또는 의미)를 구성하는 순수 의식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지도 만들지도 않은 세계에 자의와 상관없이 던져진 존재라고 지적했다. 인간은 자의와 상관없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이런 상태를 하이데거는 ㉠‘피투성(被投性)’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 피투성은 인간의 기분, 그 중에서도 불안을 통해 자각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상생활의 어느 순간 ‘왜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을까.’, 혹은 ‘머지않아 죽을 나에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와 같은 불안을 내포한 물음은 누구에게나 살며시 다가온다. 그때 우리는 ‘왜 나는 여기에 존재하는가.’라는 불안으로부터 자신이 이미 이 세상에 던져졌고 여기에서 절대로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피투성)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일단 피투성을 자각할 때, 인간은 언젠가 자신이 죽게 될 것이며 이 세상을 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런 죽음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자신의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포착해서 재구성하는 시도가 시작된다. 이런 시도는 ㉡‘기투(企投)’라고 불린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세계 속에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던져진 인간은 불안을 통해서 이런 상황을 자각하는 동시에 새로운 자신을 포착해내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작한다. 죽음의 자각을 통해서 인간은 자신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던져 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불안을 통해서 피투성에 ⓑ직면하지만, 역으로 이런 상황 때문에 최초로 존재와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처음의 소크라테스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의 패러독스에 대해 하이데거는,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불안과 죽음의 자각을 통해서 진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답한 것이다. 


― 발리스 듀스, 「그림으로 이해하는 현대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