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맹자, 순자 ⓒ http://naver.me/GF2VaYja

 

공자·맹자·순자로 대표되는 고대 유가(儒家)들은 사회의 개선과 현실의 구원을 고민하면서 도덕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사회는 자신을 둘러싼 ‘관계의 안’을 확장시켜 공동체와 일체를 이루는 사회였다. 그런데 이러한 도덕적 이상사회에 대한 꿈은 현실의 욕망에 부딪히면서 실현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타인을 배척하고 약탈하는 소인들의 창궐로 ‘관계의 안’은 축소․고립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황에서 고대 유가들은 사적 이익의 추구라는 개인적 욕망에 대해 해명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고대 유가들은 인간의 욕망을 자연적인 사실로 인정했다. 또 그들은 학문 추구와 도덕적 삶의 즐거움에 대한 욕망도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대 유가들은 자연적·물질적인 욕망을 어떻게 다스려야 도덕적인 욕망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사유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고대 유가들이 바라는 도덕 사회, ‘관계의 안’을 확장시키는 삶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익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활동을 부정할 뿐, 정치적․도덕적 업적과 성취에 따르는 이익의 수취와 향유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또한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 삶은 부정하였지만, 백성 모두의 이익을 위한 군주의 행동은 지지하였다. ‘이익’류 욕망이 개인에게 매몰되는 욕망인지, 공동체를 향해 열린 욕망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맹자는 “욕망을 줄여라!”라는 과욕(寡欲)과 “욕망을 없애자!”라는 거욕(去欲)을 주창했다. 맹자가 생각하건대 마음[心]은 사단(四端)과 같은 도덕적 경향성과 식욕이나 성욕 같은 물질적 욕망이 함께 발생하는 터전이다. 물질적 욕망은 자연적이며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반면, 도덕적 경향성은 추진력이 미약하여 그것의 현실화에는 의지라는 내적 강제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맹자는 물질적 욕망 줄이기와 도덕적 경향성 키우기를 제시했던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도덕적 경향성과 물질적 욕망 사이의 자연적 세력을 전도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물질적 욕망을 도덕적 경향성의 세력 아래로 순치(馴致)*시키고자 기도했다. 

 

순자는 “욕망을 유도하자!”라는 도욕(道欲) 또는 “욕망을 길러주자!”라는 양욕(養欲)을 주창했다. 순자는 욕망의 생성은 자연적 사실이므로 욕망 그 자체를 없애거나 줄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욕망의 ‘있음’과 ‘많음’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또한 욕망의 생성과 현실화를 동일시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욕망의 생성은 자연적 사실로써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것의 현실화는 마음의 금지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그 욕구에 지배되지 않고, 반드시 마음의 지배 아래 ‘하고 싶음’을 유도하거나 절제하는 방식으로 행위를 한다고 순자는 주장했다. 

 

고대 유가들은 ㉠‘이익’류 욕망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를 해명함으로써, ‘관계의 안’에 놓여 있는 인간에게 이를 팽창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사욕은 인간의 관계망을 소실하도록 만들어 사람을 물리적 개체로 고립시킨다. 이때 사람은 물질적 욕망의 자연적이며 강력한 역량을 우회, 전환시키기 위해서 그것을 목적이 아니라 수반(隨伴)*으로 보거나, 혼재 속의 순치로 보거나, 제약 속의 충족으로 봄으로써 ‘관계의 안’을 팽창시켜 개인과 공동체가 일체화의 길로 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게 된다.

 

* 순치(馴致) : 목적한 상태로 차차 이르게 함 

* 수반(隨伴) : 어떤 일과 더불어 생김

 

― 신정근,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