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5년에 그려진 잔 다르크.


영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어떻게 신비화되고 통속화되는가, 영웅에 대한 기억이 시대에 따라 어떤 변천을 겪는가를 탐구하는 것은 ‘더 사실에 가까운 영웅’의 모습에 다가서려는 이들에게 필수적이다. 영웅을 둘러싼 신화가 만들어지고 전승되는 과정과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특히 국민 정체성 형성에 그들이 간여한 바를 추적함으로써, 우리는 영웅을 만들고 그들의 초상을 새롭게 덧칠해 온 각 시대의 서로 다른 욕망을 읽어 내어 그 시대로부터 객관적인 거리를 획득한다.


무릇 영웅이란 죽고 나서 한층 더 길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며, 그런 사후 인생이 펼쳐지는 무대는 바로 후대인들의 변화무쌍한 기억이다. 잔 다르크는 계몽주의 시대에는 ‘신비와 경건을 가장한 바보 처녀’로 치부되었지만, 프랑스 혁명기와 나폴레옹 집권기에 와서는 애국의 화신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의 성장과 더불어 그 숭배의 열기가 더 달아올라, 19세기 공화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은 잔을 ‘프랑스의 수호자’이자 ‘민중의 딸’로 재창조했다. 국경을 넘어 20세기 여성 참정 권자들에게 잔은 ‘전투적 페미니즘’의 상징이었고 한국에서는 ‘프랑스의 유관순 열사’로 기억되었다.


영웅에 대한 후대인들의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추구하는 문제의식의 배경에는 ‘기억의 관리’가 부와 권력의 분배 못지않게 중요한 사회적 과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인간의 기억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틀 내에서 형성되며,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된 특정한 사회 집단에 의해서 선택적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기억의 문제는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적이 며 사회적인 권력의 문제이다. 동시에 이는 기억과 표리 관계인 망각의 문제이기도 하다.


근대 역사에서 기억이 구성되고 가공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위는 ‘민족’이었다. 근대 역사학 자체의 탄생과도 밀접하게 관련되는 ‘민족의 과거’에 대한 기억에서 영웅은 중요한 기억의 터전을 차지해 왔다. 이때 영웅은 그저 비범한 능력의 소유 자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영광과 상처를 상징하는 육화된 기호로서 구성원에게 동일시할 대상으로 나타난다.


이때 영웅은 종종 ‘애국’의 덕과 결부되었다. 한국에서도 봉건 시대에 군의 이념에 충실했던 인물이 계몽 운동기에 들어서 구국의 영웅으로 재탄생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박은식, 신채호 등 개화기 지식인들이 ‘민족정신’에 눈뜨면서 재발견한 이순신이나 을지문덕과 같은 영웅은 이제 ‘군’이 아닌 ‘애국’을 지상 과제로 삼는다. 이같은 근대의 영웅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하나의 ‘국민’으로 묶어 주는 상상의 원천이 되었다. 이렇게 영웅은 구성원 모두를 상하, 수평 관계 속에서 매 개하고 연결한다는 의미에서 하나의 미디어였다.


― ‘영웅의 창조와 전승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