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동양의 눈, 서양의 눈>의 표지.


고대의 조각품을 올바르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감상의 고전적인 척도가 필요하다. 동서양의 고대 조각품들은 대부분 그 당시 사람들의 종교적 이상을 실현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의 조각품을 바람직하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그 조작이 상징하는 그 무엇에 대한 숭배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럴 때 그것은 단순히 돌로 만들어진 물질의 의미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고대의 조각품을 볼 때, 미적 정서가 직감적으로 촉발(觸發)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적 정서를 중심으로 작품을 감상하게 된 것은 훨씬 후대에 와서야 가능해진 것이다. 한마디로 고대의 조각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성함’, ‘거룩함’등과 같은 초월적인 느낌을 갖도록 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다.


19세기 초 지중해 연안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미로의 비너스’상이 좋은 사례가 된다. 발견 당시 이것은 굴 안의 북쪽 벽 앞에 서 있었고, 그 앞에는 제단으로 보이는 큰 돌 주위에 토기(土器)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이로 미루어 그리스 시대의 인체 조각상은 동양의 불상처럼 신정에 모셔졌으며, 당시 사람들의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의 조각품을 감상하는 방법으로 그리스의 조각품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조각상에 나타난 그들의 ㉡인체 탐구 정신은 지극히 사실적(事實的)이면서도 이상화(理想化)된 것이었다. 이런 정신은 서구 미술의 근본 정신이 되었다. 동양에서는 자연물이 표현의 주된 대상이었던 데 반하여, 서구에서는 자연물보다는 주로 인체를 표현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서구인들은 그 많은 소재 중에서 하필이면 인간만을 주된 대상으로 삼았을까? 그것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그들의 독특한 사상에서 비롯된다. 즉, 인간의 몸에는 다른 어떤 피조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황금비례가 있는데, 이 비례가 만물을 재는 기준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인체를 탐구하는 것은 그 속에 신이 인간을 창조한 모든 비밀이 숨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서구의 미술가들이 누드를 평생의 소재로 삼게 한 불후(不朽)의 사상인 것이다.


한편, 동양의 화가들은 유구한 세월 동안 산․물․나무․동물․곤충․꽃 등과 같은 자연의 물상을 단골 소재로 삼았다. 동양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사생(寫生)이라고 일컬어 왔다. 사생은 산수나 화조(花鳥)처럼 자연을 그리는 일을 말한다. 이것은 자연물을 있는 그대로 모방한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그들이 그리고자 하는 목적은 단순히 자연물을 있는 그대로 모방한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그들이 그리고자 하는 목적은 단순히 자연물의 외형을 재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대상이 어떻게 스스로 살아서 움직이는가를 탐구하고 또 이러한 자연의 비밀이 무엇인지를 파악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탐구했던 것이다. 동양 미술이 자연의 탐구를 통하여 인간의 본성을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듯 서구와 동양의 미술은 얼핏 보아 서로 대립적인 것 같지만, 궁극적인 정신의 지향점은 일치한다.㉢자연은 인간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자연이 곧 인간이고 인간이 또한 자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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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