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초반, 가야국의 가실왕이 중국의 악기를 모방하여 가야금을 처음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보다 오래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 고분에서 오늘날의 가야금과 같은 모양의 악기를 들고 있는 흙인형이 출토되었고, 3세기 후반 중국 진(晉)나라의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에 우리 나라 남부 지방[변진(弁辰)]에 지금의 가야금 비슷한 현악기가 존재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가실왕의 가야금 창제설, 특히 중국 악기의 모방이라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고, 오래 전부터 전해 오던 우리 악기를 가실왕이 중국 악기를 참조하여 개량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가야국의 악사인 우륵이 신라에 투항하고, 그를 통하여 가야의 음악이 신라에 정착되는 과정은 당시의 음악사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기에 <삼국사기>의 기록을 인용해 본다. 

신라의 옛 기록에 의하면, 가야국의 가실왕이 당나라의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다. 왕이 “여러 나라의 방언이 서로 다른데 어찌 음악이 같을 수 있겠는가“? 하며 악사 우륵에게 명하여 열두 곡을 만들게 하였다.

나중에 그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우륵은 악기를 들고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하였다. 왕은 우륵을 맞아들여 국원(國原)에 살게하고, 계고․법지․만덕 세 사람으로 하여금 우륵의 음악을 전수받게 하였다. 세 사람이 그 음악을 다 배운 후 서로 의논하기를 “이 음악은 번거롭고 거칠어 아정(雅正)하지 못하다.” 하고, 이를 줄여 다섯 곡으로 만들었다.


우륵이 이를 듣고 크게 화를 내었으나, 다섯 곡의 음악을 다 듣고 나서는 감탄의 눈물을 흘리며 “재미있으되 저속하지 않고[樂而不流], 슬프되 비통하지 않으니〔哀而不悲〕 가히 올바른 음악이다. 그러니 왕께 나아가 연주하여라.” 하였다. 왕이 음악을 듣고 크게 기뻐하자, ㉠“가야는 망한 나라인데, 그 나라의 음악을 취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고 신하들이 간언하였다. 그러자 왕은 “왕이 나라를 잘못 다스려 망한 것이지 음악이 무슨 죄가 있는가?” 하며 이 음악을 취하여 신라의 궁중 음악으로 삼았다.

<삼국사기>에는 우륵이 작곡한 열두 곡의 이름을 전하고 있는데, 이들 음악은 민요처럼 당시 가야 여러 지방의 향토적인 특성이 강하게 드러난 음악이었던 것 같다.


진흥왕이 우륵을 만난 낭성(娘城)은 지금의 청주 지방인데, 왕은 그를 지금의 충주인 국원에 살도록 하였다. 그리고 신라의 관리 세 사람을 선발하여 그에게서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는데, 우륵은 제자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 법지에게는 노래,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고 한다. 우륵은 고향 생각이 날 때면 멀리 고향 하늘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올라 가야금으로 향수를 달랬는데, 그 언덕이 바로 지금의 탄금대(彈琴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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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