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어느 날,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J.Cage)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가 강의를 한 곳은 사다리 꼭대기였고, 그 내용은 긴 침묵과 춤이었다. 이 행위는 일반적인 강의 형식과 내용을 뒤집어 놓은 것이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또 어떤 작가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 20개를 ⓐ길거리에서 녹게 내버려 두어, 사물이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과정을 송두리째 보여 주기도 했다. 다른 예로는 빌딩만한 립스틱이나 전기 플러그 등과 같은 작품을 떠올려도 좋겠다. 친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낯선 것을 친숙한 것으로 보여 주어 인간을 먼 상상의 여행길로 나서게 하는 이런 예술 행위의 본질은 무엇일까?

 

해프닝(happening)이란 장르는 글자 그대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며, 말보다는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소재들을 중요한 표현의 도구로 삼는다. 공연은 폐쇄된 극장이 아니라 화랑이나 길거리, 공원, 시장, 부엌 등과 같은 일상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동성이 뛰어나다. 또한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사건과 행동들이 파편적으로 이어져 있어 기이하고 추상적이기도 하다. 대화는 생략되거나 아예 없으며, 때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말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를 통해 해프닝은 우리 삶의 고통이나 희망 등을 논리적인 말로는 더 이상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내세운다. 이러한 해프닝의 발상은 미술의 콜라주, 영화의 몽타주와 비슷하고, 삶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현대 연극, 랩과 같은 대중 음악과도 통한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일회적이고, 일관된 논리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해프닝과 삶 자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다양한 예술 사이의 벽을 무너뜨리는 해프닝은 기존 예술에서의 관객의 역할을 변화시켰다. 행위자들은 관객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고함을 지르거나 물을 끼얹으면서 관객들을 자극하고 희롱하기도 한다. 공연은 정해진 어느 한 곳이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혹은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며, 관객들은 ⓑ볼거리를 따라 옮겨 다니면서 각기 다른 관점을 지닌 장면들을 보기도 한다. 이것은 관객들을 공연에 참여하게 하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해프닝은 삶과 예술이 분리되지 않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일상적 삶에 개입하는 의식(儀式)이 되고자 한다. 나아가 예술 시장에서 상징적 재화로 소수 사람들 사이에서 거래되는 것을 거부한다. 또 해프닝은 ㉠박물관에 완성된 작품으로 전시되고 보존되는 기존 예술의 관습에도 저항한다.

 

이와 같은 예술적 현상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정신적 모험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인습적인 사회 제도에 순응하는 것을 비판하고 고정된 예술의 개념을 변혁하려고 했던 해프닝은 우연적 사건, 개인의 자의식 등을 강조해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에서 안락한 감정에 마비되어 있는 우리들을 휘저어 놓으면서 삶과 예술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는 이러한 예술적 모험은 좀 더 다양한 모습으로 예술의 지평을 넓혀 갈 것이다.

 

――― 

@ 200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