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회화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아이 특유의 신체적 특성이 고려되지 않은 채 그저 어른을 작게 그린 ‘축소된 어른’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런 면에서 현대회화의 작가들은 16세기 초 카로토의 <그림을 든 빨간 머리 소년>이라는 작품에 주목한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년은 아이 특유의 신체적 특성과 장난기 머금은 웃음을 통해 아동만의 매력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아이를 아이답게 묘사했다는 점 외에, 아이가 그린 그림이 소재로 쓰였다는 점에서도 주목을 받는다. 아주 오랫동안 아이가 그린 그림이 서구 회화에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A]에는 작품 속 소년이 그린 것처럼 보이는 그림 [B]가 등장하는데, 전문가에 따르면 [B]는 그림 속 소년보다는 더 어린 아이가 그린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즉, [B]는 진짜 소년이 그린 그림이라기보다는 화가가 생각하는 아이의 그림이라는 얘기다. 카로토는 대상을 눈에 보이는 것과 똑같이 재현하는 것을 중시했던 당시 르네상스 회화의 경향과는 다르게, 상상한 것을 꾸밈없이 순수하게 드러내는 아이들의 표현 방식을 따랐던 것이다. 그 이유는 카로토가 르네상스 이래로 내려오는 사실적 재현이 유일한 가치가 아님을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실물을 꼭 닮게 그리는 기술은 거의 완성 단계에 도달했고 19세기에 카메라까지 발명되면서, 도처에서 사물을 꼭 빼닮은 이미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현실은 당시 화가들에게는 위기였고, 그래서 새로운 출발로 선택한 방식이 근원으로 ⓐ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몇 몇의 현대 화가들은 사회화를 겪지 않은 아동을 상상력과 잠재력의 근원으로 보고, 유년기의 화풍으로 돌아가기로 했던 것이다.


현대 화가들이 이처럼 유년기의 화풍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은 결코 사실적 묘사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미술사를 ㉠ 사실적 재현 기술의 발전 과정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유년기 화풍이 미숙함의 산물일 수 있다. 하지만 미술사를 움직이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의지’라고 말한 미술 사학자 알로이스 리글처럼 미술사를 ㉡ 상이한 ‘표현 의지’들이 교차하는 장(場)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유년기 화풍이 어른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예술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현대 화가들이 유년기 화풍에 주목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현대회화의 과제가 외부의 ‘재현’에서 내면의 ‘표현’으로 바뀐 것과 관련이 있다. 원근법처럼 대상을 ‘보이는 대로’ 재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은 오히려 ‘표현’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느끼는 대로’ 그리는 데 필요한 것은 학습되지 않은, 순수함과 솔직함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화가들의 시도는 ‘퇴화’가 아니라, ‘창조적 역행’이라 할 수 있다.


― (출전) 진중권, 「교수대 위의 까치」



화가 김점선(1946~2009)의 도롱뇽 알 그림 연작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