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세종이 주도하여 창제한 세계적인 문자로서 세계 문자 역사상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됨으로써 한글이 만들어진 원리가 마침내 세상에 드러났다. 훈민정음의 원리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받은 미국 컬럼비아 대학 동아시아학 교수 게리 레드야드는 자신의 학위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글자 모양과 기능을 관련시킨다는 착상과 그 착상을 실현한 방식에 정녕 경탄을 금할 수 없다. 유구하고 다양한 문자의 역사에서 그런 일은 있어 본 적이 없다. 소리 종류에 따라 글자 모양을 체계화한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다. 그런데 그 글자 모양 자체가 그 소리와 관련된 조음(造音) 기관을 본뜬 것이라니! 이것은 견줄 데 없는 언어학적 호사(豪奢)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소리의 종류에 따라 글자 모양을 체계화’했다는 레드야드의 말은 무슨 뜻인가? 이는 조음 기관을 본뜬 ㉡기본 글자 다섯(ㄱ, ㄴ, ㅁ, ㅅ, ㅇ)에다 한 획씩 더하는 방식으로 글자를 생성하여 그 글자들이 계열화를 이루게 하였다는 뜻이다. 예컨대 연구개음(여린입천장소리)인 ‘ㄱ’에 획을 더해 같은 연구개음이되 거센소리 글자인 ‘ㅋ’을 만들고, 입술소리인 ‘ㅁ’에 획을 차례로 더해 같은 입술소리이되 새로운 자질(資質)이 더해진 ‘ㅂ’과 ‘ㅍ’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로마 문자와 비교해 보면 한글에 함축된 음운학 지식이 얼마나 깊고 정교한지 금방 드러난다. 예컨대 이나 잇몸에 혀를 댔다 떼면서 내는 소리들을 로마 문자로는 ‘N, D, T’로 표시하지만, 이 글자들 사이에는 형태적 유사성이 전혀 없다. 그러나 한글은 이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글자를 ‘ㄴ, ㄷ, ㅌ’처럼 형태적으로 비슷하게 계열화함으로써, 이 소리들이 비록 자질은 다르지만 소리나는 곳은 같다는 것을 한눈에 보여 준다. 이 말은 이미 훈민정음 창제자들은 음소(音素) 단위의 분석에서 더 나아가, 현대 언어학자들과 같이 음소를 다시 자질로 나눌 줄 알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모음을 생성하는 방식도 매우 과학적임을 알 수 있다. 자음과 마찬가지로 ㉢모음의 기본자( ·, ㅡ, ㅣ)를 만든 후, 이 기본자의 어울림으로 초출자(ㅗ, ㅏ, ㅜ, ㅓ)를 만들고, 이 ㉣단모음 7자를 다양하게 결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글자 모양과 소리(이중‧삼중 모음)를 생성한 것이다. 여기에다 빼놓을 수 없는 한글의 장점은, 모음의 소리값이 항상 일정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모음은 축약(縮約)의 경우가 아니라면 언제 어느 때라도 일정한 소리를 유지하게 되어 있다. 영어 ‘A, E, I, O, U’가 각종 단어에서 얼마나 다양한 소리를 내는지를 고려해 보면 우리 한글이 얼마나 익히기 쉬운 우수한 문자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글의 참된 가치는 날이 갈수록 더욱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뛰어난 것이라도, 우리가 깊이 연구하여 그 가치를 드러내고 나아가 그것을 세계에 널리 알려야 참된 가치를 올바로 살릴 수 있다는 점이다. 한글은 우리 민족 문화를 뛰어넘어 인류 문화에 빛나는 금자탑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고종석, '한글, 언어학적 호사의 극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