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주시경 선생은 말과 글을 정리하는 일은 집안을 청소하는 일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집안이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면 정신마저 혼몽해지는 일이 있듯이 우리말을 갈고 닦지 않으며 국민 정신이 해이해지고 나라의 힘이 약해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일제가 통치하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우리 선학(先學)들은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혼신의 정열을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얼마 전 어느 국어학자가 정년을 맞이하면서 자신과 제자들의 글을 모아서 엮어 낸 수상집의 차례를 보고 우리말을 가꾸는 길이란 결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일이 있다. ㉠차례를  ‘첫째 마당, 둘째 마당’과 같은 이름을 사용하여 꾸몄던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흔히 쓰는 ‘평평하게 닦아 놓은 넓은 땅’을 뜻하는 ‘마당’에다 책의 내용을 가른다는 새로운 뜻을 준 것이다.


새로운 낱말을 만들 때에는 몇몇 선학들이 시도했듯이 ‘매가름, 목’처럼 일상어와 인연을 맺기가 어려운 것을 쓰거나, ‘엮, 묶’과 같이 낱말의 한 부분을 따오는 방식보다는 역시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새로운 개념을 불어넣은 방식을 취하는 것이 언어 대중의 기호를 충족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된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고장에서는 시멘트를 ‘돌가루’라고 불렀다. 이런 말들은 자연적으로 생겨 난 훌륭한 우리 고유어인데도 불구하고, 사전에도 실리지 않고 그냥 폐어가 되어 버렸다. 지금은 고향에 가도 이런 말을 들을 수 없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얼마 전, 고속 도로의 옆길을 가리키는 말을 종전대로 써오던 용어인 ‘노견(路肩)’에서 ‘갓길’로 바꾸었다는 보도를 듣고, 우리의 언어 생활도 이제 바른 방향을 잡아 가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우리말을 사랑하고 발전시키는 문제와 관련하여 지금까지는 우리말을 살려 쓰는 문제를 주로 이야기했지만, 한자어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자어를 무조건 외래어로 보아 이를 배척하는 것이 국어를 갈고 다듬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지만, 그런 일은 우선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 한자어 가운데 오랜 세월 동안 사용되어 오면서 우리말의 어휘 체계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미 외래어로 보기가 어렵게 된 말들이 많다. 이를 하루 아침에 사용하지 말자고 한다면, 우리가 가진 어휘의 양은 갑자기 절반 이하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우리말에서 고유어와 한자어는 각각 독특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상황에 따라 한자어보다 고유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이해가 쉬운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흔히 보는 “차례차례 승차합시다”는 “차례차례 탑시다”로 바꾸어 적는 것이 훨씬 이해가 빠르고 음절이 줄어드니 그만큼 경제적이다. 이처럼 같은 개념을 나타내는 말로서 한자어와 고유어가 공존할 때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고유어를 선택하여 쓰는 것이 좋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감한다. 이를테면 ‘조류(鳥類)’와 ‘날짐승’의 경우, 그 뜻이 같다고 한다면 후자를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류’를 완전히 버릴 수 있느냐 하면 반드시 그럴 수만은 없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우리말에는 ‘이 - 치아(齒牙)’의 경우처럼 한자어가 존대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는 관습이 있다. 현재로서는 이 같은 한자어들을 무조건 사용하지 말자고 할 수는 없다. 만약, 나이 드신 분께 ㉡“어르신 이는 아직 튼튼하시지요?”처럼 말을 한다면,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고유어가 일상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큰 불편이 없지만, 전문 영역에서 사용될 때에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데 부족한 면이 있기 때문에 한자어들을 무조건 버리기가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일상 생활에서는 순 우리말인 ‘값, 글, 옷, 생각’만을 사용하더라도 별다른 지장이 없다. 그렇지만 ㉢이들에는 저 마다 독특한 용법을 지니는 한자어들이 대응하고 있어, 한자어들은 고유어보다 의미가 더 구체적이면서 분화된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러한 한자어들을 단지 한자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배척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어떤 사람이 읽을 글인가에 따라 어휘 선택의 폭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일반 대중들이 모두 보아야 하는 글에서는 쉬운 우리말을 써도 가능할 것이고, 정확한 표현이 필요한 글에서는 한자어라고 하더라도 바르게 구사할 줄 아는 것이 우리말을 풍부하게 가꾸는 길일 것이다.


_고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