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과 지각은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는 감각을 지각으로 바꿔 놓는가? 감각은 그 자체로서는 단지 자극에 대한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경험의 시작 단계로 그것 자체로는 아직 인식이 아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감각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어떤 대상-예컨대 사과-의 둘레에 모였다고 하자. 코의 후각, 혀의 미각, 망막의 시각, 형태를 알아내는 손가락과 손의 촉각을 이 사물의 둘레에 모이게 하자. 그러면 이제 자극에 대한 의식보다는 오히려 특수한 대상에 대한 의식이 생긴다. 다시 말하면 지각이 생긴다. 감각이 인식으로 옮겨 간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이행은 자동적인가? 여러 가지 감각이 저절로 모여서 질서를 갖추고 지각이 되는가? 경험주의자들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칸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감각은 피부와 눈과 귀와 혀로부터 뇌에 이르는 무수한 신경을 통해 전달된다. 이렇게 전달되는 감각들은 그냥 놓아두면 끝까지 오합지졸이며 혼돈의 ‘다양’에 지나지 않는다. 전선의 무수한 지점으로부터 한 장군에게 보내는 보고들이 아무런 도움 없이 저절로 이해되어 명령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이 오합지졸, 곧 감각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 감각을 취사선택해서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고 지휘하고 조정하는 힘이 있다.


칸트는 우선 모든 보고가 반드시 접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현재의 목적에 알맞은 지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감각만이 선택된다는 것이다. 시계가 똑딱거리고 있어도 들리지 않다가 우리의 목적에 시계 소리가 필요한 경우에는 즉시 그 시계 소리가 전보다 커진 것도 아닌데 들리게 된다. 감각은 심부름꾼으로서 우리가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고, 우리가 필요로 하지 않는 한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심부름꾼을 선택하고 부리는 사람, 즉 그들의 주인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칸트는 두 가지 인식의 틀, 곧 ㉠공간과 시간을 통해 감각이라는 자료를 정리한다고 생각했다. 장군이 제출된 보고를 발신 장소와 작성 시간에 따라 정리하듯이 우리는 여러 가지 감각을 공간과 시간 속에 배열하고 여러 가지 감각을 여기의 이 대상, 저기의 저 대상, 현재 또는 과거에 귀속시킨다. 이 때 공간과 시간은 지각된 사물이 아니라 지각의 방식, 감각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인식의 틀이다. 이미 정돈되었거나 앞으로 정돈될 모든 경험은 공간과 시간을 포함하고 또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은 경험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경험에 좌우되지 않기 때문에 공간 및 시간의 법칙은 절대적이고 필연적이고 불변한다. 이렇게 해서 칸트는 경험주의자들과 달리 우리가 경험을 파악하는 방식 자체에 경험에 좌우되지 않는 것, 즉 인식 주체가 있음을 밝혔다.


― 윌 듀란트, ‘선험적 감성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