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 '바람 부는 날'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서양의 예술가들은 ‘자연’을 소재로 예술 작품을 창작해 왔다. 그들이 다룬 자연은 산, 강, 바다와 같은 풍경뿐만 아니라, 동ㆍ식물의 개별적 형상, 인간의 신체, 자연의 질서 등을 모두 포괄한다. 서양에서는 여러 예술 사조와 예술 이론이 등장했는데, 이는 자연을 바라보는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각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 시대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자연을 대상으로 삼은 대표적 사조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있다. 두 사조의 관심은 ‘자연의 모방’에 있었지만, 자연을 모방하려는 목적과 방법, 또 모방하려는 자연의 종류가 달랐다. 고전주의의 핵심 이론은 ‘아름다운 자연의 모방’으로, ⓐ고전주의자들이 주로 모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우리 안의 자연 즉, 인간의 신체였다. 그들은 자연의 모방을 통해 궁극적으로 미적 이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들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방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모든 자연은 아름다움과 결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부분은 모방하고 결함 있는 부분은 수정하여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했다.  


예술에서 모방의 대상으로 우리 밖의 자연 즉, 풍경이 인간을 제치고 예술의 주요한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18세기에 시작된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을 원초적이고 거대한 힘을 지니고 완전무결한 것으로 인식한 반면에, 인간은 왜소하고 미약한 존재로 인식했다. 심지어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의 힘을 압도하는 자연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자연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자연을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역동적으로 형상화했다.


19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서양 사회는 농경 사회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공업 사회로 진입하는데, 이때 등장한 예술 사조가 ⓒ모더니즘이다. 이 시대의 예술가들은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 주었다. 고전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자연을 모방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기술의 진보에 대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던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더 이상 자연을 모방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은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으며, 그런 자연을 정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대상은 인간이 힘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자연을 예술의 소재로 삼았지만,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연을 현실과 다른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1차, 2차 세계 대전의 비극을 경험한 서양의 현대 예술가들은 자연의 인간화를 주장한 모더니즘 예술가들의 자연관에 반기를 들었다. 특히 ⓓ생태 예술가들은 과학과 기술 문명으로 인해 황폐해진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로는 자연의 모습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보았고,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평화롭게 관계 맺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런데 생태 예술가들이 말하는 모방이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지닌 가치와 정신 등을 닮으려는 실천적 모방이다. 인공의 산물이지만 마치 자연의 산물로 보일 정도로 자연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 진중권, ‘서양 예술의 자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