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 응(?)


사람들은 때로 초인을 꿈꾼다. ‘초인적인 힘’, ‘초인적인 능력’ 같은 말은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래서 대중문화는 이런 식의 내용을 즐겨 다룬다. 할리우드가 만들어내는 ‘~맨’류의 작품들이 전형적인 예이다. 이것은 공상적인, 허깨비 같은 초인 개념이다.


초인은 어떤 현란하고 엄청난 일을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고난을 초연하게 극복할 수 있는 사람, 원한을 사랑으로 덮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초인의 철학은 우리에게 이 힘겨운 세상을 미소 지으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장자』는 우리에게 이런 초인의 철학을 보여 준다. 『장자』는 눈앞의 작은 이익들에 집착하는 우리의 눈을 더 넓고 깊은 지평으로 돌리게 해 준다.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찬 우리의 마음을 호방한 용기와 기쁨으로 바꾸어 준다.


그러나 『장자』의 이런 호방함과 초연함은 깊은 체험이 결여된 들뜬 선언이나 호언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이 책의 행간에서 처절할 정도의 비극적 눈길, 잔혹한 세상을 바라보는 젖은 눈길을 느낄 수 있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잔인무도한 현실에 대한 고난에 찬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장자』는 이런 심연을 딛고 일어서서 초연함과 희망을 주기에, 위대한 텍스트이다.


장자의 사유는 철저하게 비사변적이다. 만일 우리가 경험주의라는 말을 직접적 지각이나 실험, 사료의 확보와 같은 편협한 과학적 방법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사유의 근본 태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장자는 철저한 경험주의 철학자이다. 이때의 경험은 현실에 대한 외적인 지각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 인생이라는 것에 대한 가장 정직한 눈길이라는 의미이다.


장자는 박진감 넘치는 필치와 인상 깊은 이미지들로 갑갑한 현실과 좁쌀 같은 인간들의 세계를 벗어나려 한다. 장자의 사유는 변신의 사유이다. 다른 존재가 되고자 하는 사유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체제, 사물들을 가르는 분절선들, 기호들의 체계, 제도가 부여하는 자리와 지위들, 현실이 요구하는 가치들....... 이런 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삶을 찾아 나설 용기가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과 장자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인식의 간격이 존재한다.


인간의 사회는 자리들과 이름들로 구성된다. 자리들과 이름들의 체계는 위(位)를 구성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위의 체계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발버둥치고 산다. 그러나 장자는 이 위(位)를 거부한다. 그것은 무위(無位)의 삶이다. 그러나 이 무위의 삶은 무엇인가 도드라지는 능력을 보여준다거나 현란하고 엄청난 무엇인가를 이룩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무위의 삶은 위(位)가 강요하는 갈등, 경쟁, 질시와 시기, 피곤한 타인의 눈길들, 허망한 기쁨과 슬픔 같은 것들에서 해방되어 소요하려는 삶이다. 그러나 역으로 그러한 소요의 삶은 갖가지 힘겨운 고통들, 타인들의 피곤한 눈길들을 가져온다. 무위의 삶은 그러한 고통들과 눈길들을 감내하는 삶, 아니 감내조차도 벗어던질 수 있는 그러한 삶이다. 장자적 초인은 위(位)의 삶이 생각하는 초인이 아니라, 무위의 삶이 생각하는 초인인 것이다.


― 이정우, 「장자 다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