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는 곳에는 고통이 존재한다. 칸트는, 고통이 쾌락의 전제가 되고, 쾌락과 쾌락 사이에 개입하여 건강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고 보았다. 그런가 하면 라이프니츠는 고통을, 궁극적 선을 이루기 위한 신의 섭리가 실현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비록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신이 설정한 목표에 이른다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이러한 논의들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목적론에 입각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고통을 인간의 실천 윤리와 관련지은 철학자가 바로 레비나스다. 그렇다면 고통은 어떻게 인간의 윤리적 측면에 관여하는 것일까?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소리를 지르거나 신음 소리를 낸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고통은 자신의 수용 범위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이다. 따라서 이 외침과 신음에는 근원적으로 타인의 도움에 대한 요청이 깔려 있다. 이 요청은 곧 타인과의 관계를 연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열림’은 ‘절반의 열림’이다. 이것이 ‘완전한 열림’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 받는 사람의 호소에 대한 응답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육체를 지닌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본성에 비추어 볼 때,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응답하는 모순적인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레비나스는 인간을 자기 보존성을 지니는 존재인 동시에 타자(他者)를 지향하는 존재로 본다. 그는 ㉠‘욕구’와 ㉡‘열망’이라는 개념을 대비하여 이를 설명한다. ‘욕구’는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얻으려는 인간의 지향을 나타낸다. 이것은 외부의 것을 자신에게 동화, 통합시킴으로써 자신을 유지하려는 생명체의 자기 보존 욕구와 관련된다. 이에 반해 ‘열망’은 자신의 빈 곳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다. 타자를 열망하는 태도는 타자를 자기 안으로 통합시키거나 자기화하는 작용이 아니라 타자를 향하여 자기 자신을 열고 헌신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타자와의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고통 받는 자의 호소를 냉정하게 외면하지 못하고 자기를 희생하면서 타자에게 ㉢귀 기울이는 존재자를 레비나스는 이기적 자아와 구별하여 윤리적 자아라고 부른다. 내가 타자의 호소를 받아들일수록, 즉 나의 이기심을 버릴수록 나는 타자에 대하여 더욱 큰 책임을 느끼게 되고 그만큼 내 안의 윤리적 자아도 커져 간다. 타자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감수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대신하여 고통 받는 것이고 타자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대속(代贖)’이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고통 받는 자의 호소에 반응하는 자아는 끊임없는 자기 결단의 과정에서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윤리적 주체의 고유성을 확보한다.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 하는 타자는 왕이나 독재자,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 고아, 노숙자, 즉 고통 받는 사람들이다. 이들에 대한 대속은 마음의 선물이 아니라 자신이 먹을 빵을 내주는 것이며, 자신의 지갑을 열어 주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의 집 문을 열어 주는 것이고, 타인의 고통을 방관하지 않고 자신이 대신 지는 것이다. 이럴 때 비로소 이 세계 안에는 연민과 동정과 자비가 있게 되며 이것이 이 세상을 아래에서 떠받치고 지탱한다.


― 강영안, ‘고통의 철학-레비나스의 고통론’ / 김연숙, ‘레비나스의 윤리적 주체에 관한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