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는 유교 정치를 표방하여 오래도록 문(文)을 숭상하였다. 규장각은 이러한 전통 아래 정조(正祖) 때 왕실 도서관 겸 학술연구기관으로 출발하여, 나중에 정책 연구의 기능까지 발휘한 특별 기구였다.

 

규장각은 정조가 즉위하던 해(1776년)에 창설되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발족이 아니라, 정조가 동궁(東宮) 시절에 경희궁에 살면서 설치.운영해 온 기구를 발전시킨 것이었다. 정조는 즉위한 다음날 창덕궁 후원의 연지(蓮池) 북쪽 언덕에 이층 건물을 새로 짓도록 하고 이름을 주합루(宙合樓)라 하였다. 이 건물 1층의 이름을 처음에는 어제존각(御製尊閣)이라 하였다가 얼마 후 규장각(奎章閣)으로 개칭하여 자신의 왕위(王威), 즉 국왕으로서의 위엄에 관련되는 자료들을 보관하기 로 하였다. ‘규장’이란 본래 제왕이 지은 시문이나 조칙 등의 글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원래 규장각은 국왕 관련 자료들을 봉안하는 기구로 출발하였으나, 정조가 직접 정사를 주재하면서부터 정치적 선도 기구로 일신되었다. 이때부터 규장각의 제학(提學) 이하 관리 6인으로 하여금 다른 관직을 겸하게 하였다. 이들 대부분을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을 겸하게 함으로써, 이들 중심으로 근시직(近侍職), 즉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관직을 일원화하다시피 하였다. 이들은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였을 뿐 아니라, 과거 시험과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함께 주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일반 정사에 관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으며, 비행을 저지른 관원을 탄핵하는 권한도 가졌다.

 

문(文)을 숭상하던 조선 왕조의 국왕은 도서의 수집.관리를 중시하였다. 이 업무가 규장각의 고유 기능에 해당하였다. 정조는 세손(世孫) 시절부터 도서를 수집하였는데, 이들 장서는 즉위 후에 주합루 옆의 서재로 옮겨졌다. 정조가 자신의 즉위를 알리기 위해 청나라로 가는 사신들에게 <사고전서(四 庫全書)>를 사 오라고 명령한 것은 그의 도서 수집열을 보여 주는 유명한 일화이다. 청나라의 <사고전서> 편찬 사업은 이 때 아직 진행 중이었으며, 설령 그것이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다른 나라로 빠져나갈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었다. 규장각의 장서 규모는 정조 20년 무렵 8만여 권에 달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편 규장각에는 부속 기관으로 교서관(校書館)이 있어서 서적 출판을 전담하였다. 조선 시대 정부 인쇄소라고 할 수 있는 교서관은 본래 예조 소속이었는데, 규장각이 설치되면서 국왕의 거처인 창덕궁 가까이로 옮긴 것이다. 정조는 인쇄술에도 대단한 관심을 기울여 최소한 5종 100만 자 가량의 활자를 만들어 새 저술을 간행하였다.

 

규장각은 정조 왕정 체제의 중심 기구였기 때문에, 정조의 죽음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규장각 관리들에게 부여되었 던 특별한 권한이 정조 사후 모두 철회되면서,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기능은 유지될 수 없었다. 규장각은 역대 왕들의 글과 도서를 관리하는 기능만 가지는 기구로 남게 되었다.

 

* 초계문신 제도 : 젊은 문신들을 뽑아 재교육시키던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