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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며, 전기는 『논리 철학 논고』로 후기는 『철학적 탐구』로 대표된다. 그는 철학적 문제가 언어의 애매한 사용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언어를 분석하고 비판하여 명료화함으로써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철학적 사유는 언어에 집중되어 있다.


『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에서 주장한 ‘그림 이론’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바탕으로 전기와 다른 주장을 펼친다. 그림 이론에서는 언어의 낱말들은 대상을 명명한 것이고, 문장들은 이러한 이름들이 결합한 것이라고 본 다. 즉 낱말의 의미는 그 낱말이 ‘지시하는 대상’이다. 그런데 후기 철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그림 이론과 달리 ‘한 낱말의 의미는 그것의 사용에 있다.’라고 주장한다. 낱말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낱말이 사용되는 맥락과 규칙에 따라 파악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언어의 낱말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에 따르면 그러한 다양성은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다.


낱말의 의미와 관련하여, 비트겐슈타인은 ‘가족 유사성’이 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가족 유사성은 가족 구성원들 간의 닮음을 언어에 적용한 개념으로 ‘서로 겹치고 교차하는 유사성들의 복잡한 그물’을 의미한다. 예컨대 ‘놀이’라는 말은 카드놀이, 숨바꼭질, 끝말잇기, 축구, 야구 등 다양한 대상을 지칭할 수 있는데, 이것들 전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성질은 없고 부분들 간에 겹치고 교차하는 성질들이 있을 뿐이다. ‘놀이’라는 낱말이 지칭할 수 있는 대상들 모두에 공통되는 성질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놀이’의 본질로 고정적인 의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본질은 없고 부분들 간에 수없이 상이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는 관계들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놀이’라는 낱말은 본질적인 하나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맥락과 규칙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놀이에 비유하여 ‘언어 놀이’라는 개념을 고안했는데, 그것은 ‘언어와 그 언어가 뒤얽혀 있는 행위들로 구성된 총체’를 의미한다. 그가 이와 같은 개념을 고안한 것은 언어를 말한다는 것이 어떤 활동의 일부이며 삶의 형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부각하기 위해서이다. 그에 따르면, 언어 놀이는 사라지기도 하고 새롭게 생겨나기도 하는 것으로 그 종류와 기능이 다양하며, 다양한 언어 놀이들은 공통적 본질을 갖고 있지 않지만 가족 유사성을 형성하며 언어와 그 언어에 연관된 행위로 구성되어 있다. 예컨대 건축 현장에서 누가 “망치!”라고 말했을 때, ‘망치’는 그냥 놓여 있는 망치를 지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망치를 건네 달라는 목적으로 사용된 말이다. 그는 이 상황에서 ‘망치’가 망치라는 대상을 지시한다는 것만 안다면 그 건축 현장의 상황 속에서 진행되는 언어 놀이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맥락과 규칙을 알고 그에 따른 행위가 전제되어야 언어 놀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규칙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양식 또는 방식이라 할 수 있는 삶의 형식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공적인 것이며, 언어 놀이에서 규칙에 따르는 어떤 활동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언어라고 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규칙성이 없는 언어를 ‘사적 언어’라고 규정한 다. 그에 따르면, 사적 언어는 규칙성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나’ 자신 또한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어 언어 놀이가 불가능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사용 주체들의 ‘삶의 형식의 일치’가 언어 규칙이 작동하는 전제가 된다고 본다. 이는 언어가 의사소통의 도구일 수 있으려면 ‘정의의 일치’뿐만 아니라 ‘판단에서의 일치’도 요구된다는 것이다. ‘정의의 일치’는 낱말에 대한 정의의 일치를 말하며, ‘판단에서의 일치’는 ‘낱말 적용 방식의 일치’, 궁극적으로 ‘어떤 것에 반응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에서의 일치’를 말한다. 가령 ‘붉다’가 의사소통의 도구가 되려면, 그 말의 정의를 알아야 하고 그 정의가 서로 일치해야 하며, ‘붉다’를 사용하면서 나타나는 반응도 일치해야만 한다. 어떤 사물의 색에 대해서 ‘붉다’라고 말하면서도 그 반응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면, ‘붉다’라는 말은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될 수 없다. ‘삶의 형식의 일치’는 곧 정의와 판단에서도 일치함을 의미한다. 즉 언어 사용이 일치한다는 것은 동일한 삶의 형식을 공유함을 나타낸다.


삶의 형식의 일치가 언어 규칙의 작동 가능성의 전제라는 것은 사적 언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사적 언어는 ‘나의 의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유아론적 세계의 언어이다. 언어의 규칙이 작동 가능한 영역은 ‘나의 의식’의 유아론적 세계가 아니라 너와 나 그리고 타인들을 포함한 공동체, 즉 ‘우리들의 삶’의 세계이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 사적 언어의 가능성을 함축하는, ‘나의 의식’을 출발점으로 삼는 철학적 제재들의 허구성을 시사한다.


― 조광제, 『언어와 세계의 뫼비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