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낭케'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한 장면.
‘아낭케’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나 필연성 등을 상징하는 여신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신화적 상상력으로 세계의 현상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던 시기에 아낭케는 ‘운명으로서의 필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철학적 사유가 생겨남에 따라 아낭케는 일종의 이론적인 개념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낭케는 세계의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아낭케는 세계의 현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인 기계론적 관점과 목적론적 관점에 따라 상당히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기계론적 관점은, 세계에는 어떤 궁극의 목적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기계적인 법칙만이 존재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세계는 정교한 기계이기 때문에 이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질량, 속도 등의 역학적 개념들만으로 세계의 현상들을 설명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세계가 오늘날과 같이 변화한 것에 어떤 궁극적인 목적은 없고 오직 인과관계의 법칙성만이 존재한다고 본다. 이와 달리, 목적론적 관점은, 세계에는 어떤 궁극적인 목적이 전제되어 있고 세계는 이것을 향해 운동하고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래서 세계가 오늘날과 같이 변화한 것은 이상적인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지금의 세계는 완전하지 않다고 본다.
기계론적 관점에서 아낭케는 법칙성이라는 의미의 필연을 뜻한다.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은 이런 기계론적 관점의 아낭케를 잘 보여 준다. 이성의 작용도 일종의 원자 운동이라고 본 데모크리토스는 모양, 위치, 배열이라는 특징을 지니는 원자들이 특정하게 부딪치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정해진 결과들이 나온다는 역학적 인과 관계의 법칙만을 인정한다. 이런 법칙성이 바로 기계론적 관점에서 말하는 아낭케이다.
이와 달리 목적론적 관점에서 아낭케는 질료적 조건이라는 의미의 필연을 뜻한다. 여기서 ‘질료(質料)’는, 이상적인 목적인 ‘형상(形相)’이 현실에서 구현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조건이다. 목적론적 관점을 지닌 플라톤은, 현실에 구현되기 이전의 형상은 그 자체로 완벽한데, 질료가 형상을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에 오차나 무질서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플라톤이 생각하는 아낭케는, 형상이 현실에 구현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질료적 조건으로서의 필연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동시에 질료가 형상을 완벽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계가 있으므로 아낭케는 극복해야 할 어떤 것이라는 의미도 지니게 된다.
― 이정우, 「개념-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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