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머만의 ‘2대의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대화’ 중 일부. 창작 시기가 다른 드뷔시의 작품, 모차르트의 작품, 그레고리오 성가를 성부 1, 2, 3에 배치하고, 개별 성부의 박자와 템포는 다르게 구성했다.



음악에서는 시간이 중요하다. 음악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이다. 전통적 음악에서는 시간이 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선적인 것으로 어떤 목적을 향해 한 방향으로 흐른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시간성으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 음악 미학에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면서 목적론적 시간성에서 ⓐ벗어난 음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음악을 보여 준 대표적인 예술가로 치머만과 케이지를 들 수 있다. 


치머만은 과거, 현재, 미래가 우주적 차원에서는 연속성을 띠며 진행하지만 정신적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러, 시간을 ‘공’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는 시간이 선적인 진행에서 벗어나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가 ⓑ달라질 수 있으며, 또한 동시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처럼 시간의 여러 시점(時點)들이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치머만의 생각은 그가 다원적 사고를 추구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하나의 시간 대신 여러 개의 시간 층을 병치시켜 복합적인 시간성을 드러냈다. 


복합적인 시간성은 그의 ‘다원적 작곡 기법’으로 구현되었다. 그는 이 기법을 음악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시간의 층이 ⓒ겹친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인 ‘병사들’에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음악가들의 악곡 일부를 그대로 자신의 작품에 가져다 쓰는 콜라주 기법을 ⓓ써서 서로 다른 시간의 층을 동시에 보여 주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서로 다른 독립적인 박자와 템포를 동시에 한 작품에 사용하여 서로 다른 시간의 층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였다. 그 결과 시간의 순차적인 진행은 해체되어 여러 시간이 복잡하게 엉키게 되었다. 이를 두고 치머만은 ‘모든 음악적 사건들의 동시대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작품 속에 특정한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것을 거부한 것으로, 후대에 나타난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적 사고에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현대 음악에서 새로운 차원의 시간성을 보여 주는 또 한 명의 인물은 케이지이다. 그는 음악의 시간성 측면에서 전통적 개념을 송두리째 흔드는 새롭고 흥미진진한 시도를 보여 주었다. 그의 대표작 ‘4분 33초’에서 연주자는 무대에 등장하여 4분 33초라는 시간 동안 한 음도 연주하지 않는다. 그동안 그 시간은 예기치 않은 관객들의 기침 소리, 종이 만지는 소리, 웅성거리는 소리 등 다양한 소리들로 채워진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그는 작가의 의도나 목적에 의해 구조화된 시간성, 박자 구조에 따라 나타난 음악의 예측 가능한 시간성이라는 전통적 의미의 시간성을 부정하는 ‘우연성의 음악’을 구현하였다. 이는 음악의 시간이 전통적 음악에서처럼 음악가의 논리적 조정을 통해서만 구성되지는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케이지는 그의 작품에서 ㉠유일하게 한 번만 존재하는 음악의 시간성을 표현했다. 이러한 그의 음악은 비의도적이려는 의도 외에는 아무 의도 없이 만든 음악으로, 완성보다는 과정에 치중하는 비결정성을 띠는 것이었다. 비결정성을 띠는 음악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실험적이며, 똑같이 반복될 수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유일하다. 지금까지 음악을 시간의 연속성으로 이해했다면, 이제 그 연속성은 완전히 뒤죽박죽되었다. 음악의 시간성이 작품의 구조와 관련이 있는 만큼, 그의 음악에서는 전통적 시간성이 ⓔ무너졌다고 볼 수 있다.


― 오희숙, ‘음악 속의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