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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자신이 불행한 일을 겪었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동정심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의 이야기가 전부 꾸며낸 것이라고 말한다면, 더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감정은 그 감정을 유발하는 대상이나 사건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허구임이 분명한 공포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괴물과 그 괴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허구적 사건을 보면서 공포를 느끼는 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래드포드는 허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해 감정 반응을 보이는 현상을 ‘허구의 역설’이라 규정하고, 다음 세 가지 전제를 제시하였다.


전제 1. 우리는 존재한다고 믿는 것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한다.

전제 2. 우리는 허구적 사건이나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전제 3. 우리는 허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한다.


㉠ 이 세 가지 전제가 동시에 참일 수 없다는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 중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다. 래드포드는 감정을 유발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믿음 없이 허구에 의해서도 감정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그 감정은 존재에 대한 믿음이 결여된 것이므로 비합리적이라고 하였다. 이후 학자들은 허구에서 비롯된 감정이 합리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며, 믿음이 나 생각과 같은 인지적 요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논의를 전개해 왔다.


환영론에서는 사람들이 허구를 감상하는 동안 허구에 몰입하여 허구적 사건이나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 버리고, 그 사건이나 인물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환영에 빠져 감정 반응을 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월턴과 캐럴은 공포 영화의 관객이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에도 영화가 허구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만약 관객이 영화 속 괴물 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공포로 인해 영화관에서 도망을 가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등의 행동을 보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런 점에서 월턴과 캐럴은, 환영론은 허구에서 느끼는 감정을 설명하는 타당한 이론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월턴은 관객이 허구의 세계에 빠져드는 현상을 상상의 인물과 세계에 대해 ‘믿는 체하기’ 놀이를 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믿는 체하기란, 어린아이들이 소도구를 가지고 노는 소꿉장난 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실제 사물을 가지고 하는 일종의 상상하기이다. 공포 영화를 보는 관객은 영화를 소도구로 하는 믿는 체하기 놀이에 참여하는 중이고, 관객의 감정 반응은 허구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기의 결과인 것이다. 이때 괴물은 상상의 세계 안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다. 다만 허구적 대상에서 비롯된 감정은 상상의 세계에서만 성립하는 것일 뿐, 대상이 실제 세계에 존재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월턴은 허구를 감상할 때 유발되는 감정을 ‘유사 감정’이라고 하였다.


캐럴은 생각도 감정을 유발하는 인지적 요소라고 하면서 사고 이론을 전개하였다. 사고 이론은 허구를 감상하는 사람은 허구적 사건이나 인물 자체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생각’에 반응한다고 보았다. 마음속에서 명제가 참임을 받아들이는 상태가 믿음이라면, 명제를 그저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이 생각이다. 캐럴은 생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유발될 수 있다고 보았다. 괴물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믿음 없이 괴물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등장한 감각믿음 이론은 영화가 주는 감각 자극에 주목하여, 믿음을 ‘중심믿음’과 ‘감각믿음’으로 구분하였다. 중심믿음은 추론적 사고와 기억 등에 의해 만들어지는 믿음을, 감각믿음은 오로지 감각 경험에 의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믿음을 말한다. 건물이 불타는 영화의 장면을 보면 ‘건물에 불이 났다.’라는 감각믿음이 자동적으로 생긴다는 것이다. 감각믿음 이론에서는 관객이 허구인 영화의 내용을 인지적으로는 사실이라고 믿지 않지만 감각적으로는 사실이라고 믿고 감정 반응을 한다고 보았다. 공포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감각 경험에 의해 괴물의 존재를 경험하고 공포를 느끼는데, 이러한 감각 경험이 괴물은 허구적 대상이라는 인지적 판단에 의해 억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감각믿음 이론은 관객이 감각 경험에 의해 영화 속 괴물이 존재한다고 믿으면서도 괴물은 허구적 대상이라는 중심믿음이 있기 때문에 도망가거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허구의 감상과 그에 따른 감정 발생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허구가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허구에 대해 감정 반응을 보이는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공포 영화를 보는 관객의 공포가 인지적 경험과 감각적 경험의 통합에서 비롯된다는 최근의 논의는 영화 제작시 공포를 주는 대상의 존재감이나 위협감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 안의진, 「관객은 허구에 불과한 공포 영화의 괴물을 왜 무서워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