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로움. (엮은이 주)


고대 그리스인들은 ‘정의(正義)’를 우선적으로 ‘조화(調和)’로 받아들였다. ‘調’와 ‘和’는 여러 가지 것들이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정의는 바로 그런 의미를 갖게 된다. 더 나아가 그들은 대립자들의 조화가 정의를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세계가 어둠과 밝음, 어른과 아이 등과 같은 대립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이들 사이에는 항상 갈등과 투쟁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에 대한 그들의 고민이, 정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 기본적인 맥락이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한 ‘우주의 질서’는 조화로서의 정의 개념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우주를 구성하는 물, 불, 공기, 흙이라는 원소들이 비슷한 힘을 가지고 서로 역동적으로 작용하여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힘의 균형이 깨지면 우주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는데, 그것이 불의(不義)이다. 그런데 아낙시만드로스는 불의가 그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이전에 미약했던 것들은 강해지고 막강했던 것들은 약해져서 다시 우주의 질서가 돌아온다고 보았고, 이것이 곧 우주가 정의를 되찾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히포크라테스의 ‘건강’ 개념에도 조화로서의 정의 개념이 반영되어 있다. 그에게 건강은 몸 전체를 이루고 있는 부분들 사이의 조화였다. 히포크라테스 의학의 요점은 병이 났을 때의 치유 방법에 있다기보다는 식이요법을 통한 예방에 있다. 식이요법이란 몸의 조화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건강을 잃는다는 것, 즉 병을 얻는다는 것은 몸의 조화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조화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몸의 정의를 찾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었던 개념인 정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특정 분야인 윤리, 정치에 주로 적용되는 개념이 되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그 구성원들은 윤리적, 정치적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념의 적용 양상이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정의가 지니고 있었던 조화라는 의미는 계속 이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 개념을 윤리와 정치에 적용하였다. 윤리적 측면에서, 그는 정의가 지닌 조화의 의미를 ‘중용’이라고 규정한다. 중용은 양극단을 제외하고 그 사이에서 상황에 따른 최선을 선택하는 윤리적 탁월성이다. 예를 들면, 용감은 무모와 비겁 사이의 중용이고, 절제는 방탕과 무감각 사이의 중용이다. 즉 중용은 인간 덕성에서의 조화로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정치적 측면에서, 그는 평등과 합법성이 결합된 ‘법 앞에서의 평등’으로 정의를 규정한다. 이는 사회의 조화로운 양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이 정의로우려면 법을 제정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정의로운 윤리를 바탕으로 한 행위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 이정우, 「개념-뿌리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