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한국문화재단


<무구정광 다라니경> 두루마리에 사용된 한지(韓紙)는 1200년 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 서구식 제지 방식으로 만든 종이의 수명을 길게 잡아 100여 년 남짓이라고 할 때, 한지의 수명은 대단히 긴 것이다. 한지의 보존성이 이렇게 탁월한 이유는 한지의 강도가 높다는 점과 한지가 중성지라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같은 한지의 특성은 원료와 제조 과정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주원료인 닥나무의 껍질은 섬유 길이가 10mm 내외이다. 긴 섬유가 서로 엉겨 종이를 구성하므로 종이의 강도가 높다. 이에 비하여 나무의 목질부를 기계적으로 가공한 서양 펄프는 섬유 길이가 3~5mm로 현저히 짧다. 한지를 만들기 위해 1년생 닥나무를 11월과 2월 사이에 채취하는데, 이 시기의 닥나무는 종이 제조에 불필요한 리그닌 함유량은 적고, 종이의 원료가 되는 셀룰로오스 함유량은 많다. 또한, 겨울의 차가운 물에서 제조하기 때문에 미생물이 발생할 가능성을 줄여 종이의 변질을 예방한다.


증기로 찌거나 삶은 닥나무의 껍질에서 겉껍질을 벗긴 것을 백피라고 한다. 이것이 실질적인 종이 원료이다. 이 백피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삶는데, 이 때 표백제로 잿물을 넣는다. 잿물은 볏짚, 콩대, 메밀대 등을 태운 재로 만드는데, 주성분이 산화칼륨으로 표백력은 강하지 않으나 닥섬유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6~7시간 정도 삶은 백피를 흐르는 물에 씻은 뒤 일주일 정도 물속에 담가 놓는다. 물속에서 햇빛의 작용으로 오존, 과산화수소가 발생하여 산화 표백되는 것이다. 이 때 사용하는 물에 철분이 함유되어 있으면 종이의 산화를 촉진하므로, 한지 제조 과정에서는 철분기가 없는 물을 사용한다. 


표백, 세척한 백피를 돌 위에 올려놓고 나무 방망이로 두들겨 죽처럼 만든다. 이를 닥죽이라 한다. 이 닥죽을 나무로 만든 통[紙桶]에 넣고 물과 닥풀을 넣어 휘저어 섞는다. 닥풀은 황촉규의 뿌리에서 나오는 점액질로 만드는데 섬유소들이 서로 잘 엉기도록 한다. 닥풀을 섞어 만든 종이는 다른 약품의 첨가가 없이 그대로 중성지가 되어 시간이 흘러도 종이가 산화하지 않는다. 이 점이 양지와 한지의 뚜렷한 차이점이다.


닥죽과 닥풀이 잘 섞인 물에서 종이를 ㉠뜬다. 지통 위에 틀을 매달고 대나무 발을 얹은 다음, 앞쪽의 물은 떠서 뒤로 흘리고, 오른쪽 물은 떠서 왼쪽으로, 왼쪽 물은 떠서 오른쪽으로 흘리기를 두 번 반복한다. 이 흘림뜨기 방식으로 종이를 뜨면 섬유 조직이 상하 좌우로 얼기설기 얽히어 종이의 강도가 높아진다.


종이가 덜 말라 꾸덕꾸덕한 상태에서 엷은 쌀풀 칠을 하여 150장 정도를 쌓은 뒤, ㉡도침의 과정을 거치는데 이는 나무 방망이로 종이를 두들기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종이에 윤기가 나고, 종이의 표면이 치밀해져서 강도가 좋아진다.


한지 제조와 같은 전통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칠 것이 아니다. 옛 문헌과 옛 유물에 대한 철저한 과학적 분석과 연구를 통하여, 전통 기술을 정량화하여 대량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 김청, <종이․판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