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1455년 금속활자 인쇄술이 생겨나기 이전의 책은 주로 필경사들의 고단하고 지루한 필사 작업을 통해서 제작되었다. 당시의 책은 고위층이 아니면 소유하거나 접근하기 힘든 대상이었다. 그러나 인쇄술의 보급 이후 반세기 동안에 유럽인들은 무려 천만 권이 넘는 서적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유럽 사회를 근대 사회로 탈바꿈하게 한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도 이 기술의 보급이 아니었다면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고 말았으리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지난 1천 년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발명으로 간주되고 있는 이 금속활자 인쇄술은 어떻게 발명된 것일까?


금속활자 인쇄술을 고안하고 실용화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독일의 구텐베르크(Gutenberg)로 알려져 있다. 구텐베르크는 귀족 출신이었으나 금속 공예에 종사한 기술자이기도 했고, 자신이 고안한 인쇄 기술을 상업화한 상인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모든 기술들이 그렇듯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도 서적을 인쇄하는 데 필요한 인쇄 시스템 전체를 구성하는 기술적 요소들이 충족됨으로써 가능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기술은 필요한 활자를 손쉽게 복제해서 제작할 수 있는 기술과 인쇄 상태를 우수하게 유지하면서 대량으로 인쇄해 낼 수 있는 기술이었다. 


우선 활자를 복제하는 기술은 펀치와 모형, 그리고 수동주조기라고 불리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작고 뾰족하며 강한 금속 조각에 줄이나 끌로 문자를 볼록하게 돋을새김을 하는데, 이것을 일명 ‘펀치’라고 한다. 이 펀치에 연한 금속 조각을 올려놓고 두드려 각인을 해서 모형을 만든다. 수동 주조기에 이 모형을 장착하여 손쉽고 빠르게 활자를 주조해 내었다. 이 기술은 인쇄를 많이 하면 활자가 닳아서 쓸모가 없어지더라도 계속해서 필요한 활자를 쉽고 빠르게 주조해 낼 수 있었다. 


인쇄 상태를 우수하게 유지하면서 대량으로 찍어 내는 기술은 ‘프레스’라 불리는 압축기의 고안으로 해결되었다. 구텐베르크가 고안한 프레스는 오밀조밀하고 울퉁불퉁한 활판의 전면에 균일한 압력을 동시에 가해 종이에 찍어내는 압축기를 말한다. 이것은 고대부터 쓰이던 포도주의 압착기를 변형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그밖에도 램프 그을음과 아마씨 기름을 혼합한 새로운 잉크의 개발, 주석과 납 그리고 안티몬 등을 합성한 내구성 있는 활자의 개발, 그리고 압축기의 압력에도 견디고 잉크도 적당하게 먹는 종이의 개발 등이 어우러져 하나의 인쇄 시스템이 탄생하였다.



그런데 놀랄 만한 것은 이러한 기술이 대단히 짧은 기간에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세계 최고 수준의 인쇄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우리나라의 경우 위와 비슷한 수준의 기술을 완성하는 데 무려 20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  1234년의 동활자(銅活字) 인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된 1377년의 직지심경을 거쳐 1434년 세종 때 갑인자 금속활자 인쇄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구텐베르크는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기술을 완성해 냈다. 금속활자 인쇄술에 대한 노하우가 전무했던 유럽의 상황에서 이는 실로 불가사의에 가까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