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

 

사과를 본 철수가 ‘사과는 붉다’고 지각(知覺)했을 때, ‘사과’는 지각의 대상, ‘철수’는 지각의 주체, ‘사과가 붉다’는 지각의 내용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지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경험주의는 인간의 정신이 개입되지 않는 객관적인 세계가 있고, 그 세계가 인과적으로 지각된다고 보았다. 여기에는 대상이 주는 자극과 대상으로부터 얻는 지각의 일 대 일 대응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철수가 사과를 지각하는 경험을 예로 들면, 대상인 사과에서 자극된 색깔의 요소가 철수에게 감각되고, 그 요소가 뇌에 전달되어 ‘사과는 붉다’는 식으로 지각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험주의의 관점으로는 붉은 색과 녹색이 뒤섞인 사과를 회색으로 지각하는 경우처럼,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지각 경험은 설명하기 곤란하다.

 

주지주의는 인간의 지각에서 정신 작용을 강조했다. 달리 말해, 지각은 인간의 정신에 존재하는 개념에 감각된 요소들을 일치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예를 들어 철수가 ‘사과는 붉다’고 지각했다면, 철수의 정신에 존재하는 ‘사과’, ‘붉다’ 등의 개념을 중심으로 감각된 요소들을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식의 설명이다. 주지주의의 이론대로라면 정신 내에 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대상은 지각이 불가능해야 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메를로퐁티는 경험주의와 주지주의의 지각에 대한 설명을 비판했다. 그는 경험주의가 지각 주체에 비해 대상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오류를 범했고, 주지주의는 대상에 비해 지각 주체의 정신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오류의 공통된 원인은 지각 과정에서 지각 주체인 인간의 ‘몸’을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메를로퐁티는 인간의 ‘몸’에 ㉢주목한다. 그가 말하는 ‘몸’은 정신을 주관하는 주체이고, 육체와 정신으로 분리되지 않으며, 무엇인가를 의식하는 지향성을 지닌 ‘몸’이라는 점에서, 생리학적인 몸과 구별된다. 그는 ‘몸’을 핵심으로 하는 ‘현상학적 장’ 개념을 도입해 지각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지각은 ‘몸’이 특정한 상황에서 대상과 마주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시간성과 공간성을 지닌다. 즉, 의식의 주체로서의 ‘몸’이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대상과 마주하는 장면이 ‘현상학적 장’이고, 이러한 ‘현상학적 장’에서 ‘몸’이 ㉣체험한 것이 곧 지각이라는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관점에 따르면, 붉은 색과 녹색이 뒤섞인 대상이 회색으로 지각된 것은, ‘몸’의 착각이나 시간과 공간 등의 ㉤변수에 영향을 받은 현상학적 체험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또, 인간의 의식에 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대상에 대한 지각도 ‘몸’이 의식과 구분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개념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몸’의 체험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메를로퐁티의 지각에 대한 설명은 경험주의와 주지주의의 틀을 극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  김철호 외, 「세계의 사상 100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