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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인들에게 쫓겨 강제로 거주지를 옮겨야만 했던 케냐의 마사이 족은 새로운 정착지에 원래 살던 곳의 지명을 그대로 붙였다. 이와 비슷하게 유럽인들 역시 신대륙에 정착하면서 유럽의 지명들을 붙였다. 그들은 왜 새로운 곳에 예전의 지명을 붙였을까? 그것은 ‘공간’을 ‘장소’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증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인간이 머릿속에서 기하학적으로 ⓐ측량하고 재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에서 공간은 인간이 활동하는 배경으로만 여겨지거나 인간의 활동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본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각각의 공간들은 다른 공간들과 구별되는 자연적ㆍ인문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특징으로 ⓑ구성된 곳을 장소라고 한다. 공간이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속성을 담고 있는 개념이라면, 장소는 특수하고 예외적인 속성을 담고 있는 개념이다. 즉 장소는 주관적이고 개성적이며 독특한 것을 담고 있는 곳이다. 인간은 일상생활 속의 공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들을 경험하고, 이를 해석하며,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일상적 경험을 통해 물리적인 ‘공간’이 인간의 감정이 이입된 상징적 ‘장소’로 바뀌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나다니는 가로수 길이 그곳과 관련을 맺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지나가는 ‘공간’이지만, 헤어진 연인과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추억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장소는 그곳의 실제적인 쓰임새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갖는다. 이는 자신들의 장소를 파괴하려는 외부의 힘에 ⓓ대항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행동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또 어떤 장소를 동경하거나 향수병을 겪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결국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고, 지금도 살고 있는 또는 특히 감동적인 경험을 가졌던 장소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 장소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충만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며,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심오하고도 복잡한 곳이 바로 장소라는 것이다.


이렇게 장소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안정감을 주고 정체성을 갖게 한다. 따라서 의미 있는 장소를 경험하고, 창조하고, 유지하는 방법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이런 방법들이 사라지고 있는 탓에 ㉠몰장소성(沒場所性)이 확산되고 있다. 즉 장소가 지닌 독특하고 다양한 경험과 정체성이 약화되는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특징적인 장소들을 훼손하는 현상과 규격화된 경관 만들기 현상이 그것인데 이런 몰장소화는 인간의 정체성을 흔드는 일이다. 몰장소성은 결국 뿌리를 잘라 내고, 다양성을 획일성으로, 구체적 장소를 개념적 공간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 에드워드 렐프, ‘장소와 장소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