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사람들은 좋은 그림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 쉽게 감동을 느끼지만 과학 이론을 대하면 복잡한 논리와 딱딱한 언어 때문에 매우 어렵다고 느낀다. 그래서 흔히 과학자는 논리적 분석과 실험을 통해서 객관적 진리를 규명하고자 노력하고, 예술가는 직관적 영감에 의존해서 주관적인 미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통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 보면 많은 과학상의 발견들은 직관적 영감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나) 아인슈타인은 누구에게나 절대적 진리로 간주되었던 시간과 공간의 불변성을 뒤엎고, 상대성 이론을 통해 시간과 공간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정형화된 사고의 틀을 깨는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직관적 영감에서 나온 것으로, 과학의 발견에서 직관적 영감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 준다. 그 밖에도 뉴턴은 떨어지는 사과에서 만유인력을 발견하였고 갈릴레이는 피사의 대사원에서 기도하던 중 천장에서 흔들리는 램프를 보고 진자(振子)의 원리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 안에서 물체의 부피를 측정하는 원리를 발견하고 “유레카! 유레카!”를 외치며 집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과학의 발견이 ‘1%의 영감과 99%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은 [㉮과학의 발견에서 직관적 영감의 역할을 과소 평가한 것이다.]


(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람들은 대체로 과학자들이 논리적 분석과 추리를 통해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고 소박하게 믿고 있지만, 상당 부분 그 발견의 밑거름은 직관적 영감이고, 그것은 흔히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나온다. 대부분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발견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논리가 아니라 의식의 심연으로부터 솟아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미적 감각에 이끌린다고 고백한다. 문제와 오랜 씨름을 한 끝에 마음의 긴장과 갈등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새로운 비전이 환상처럼 나타난다는 것이다. 과학의 발견은 이러한 영감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언어로 기술하여 체계화한 것이다.


(라) 한편, 화가나 조각가, 그리고 건축가들도 때로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창조하기 위해서 사물을 분석하고 해부한다. 그리스 시대의 황금 분할은 최대의 미적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수학적 비례의 법칙을 ⓐ치밀(緻密)하게 분석한 것이고, 아름다운 음악도 ⓑ엄밀(嚴密)하게 계산된 소리의 배열과 공명 현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예술가들의 분석적 시각은 “자연의 모든 형상은 구, 원통, 원추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세잔의 말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그런가 하면 울려 퍼지는 종소리에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물결을 연상했던 시인은 소리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시적 상상력 속에 용해시 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구축하는 데 직관적 영감에 의존하는가 하면 예술가들은 과학적 지식과 관점을 도입하여 예술품을 창작해 내기도 한다.


(마) 이러한 과학과 예술의 창조적 행위는 모두 인간의 본능인 탐구 욕구에서 출발한다. 탐구 욕구는 과학자와 예술가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하여 새로운 상상을 자극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물론 과학이 목표로 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자연의 신비를 벗기는 것이지만, 그 동기는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대한 외경(畏敬)과 경이(驚異)의 감정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신비에 경이를 느낄 수 없는 사람, 감동하지 않는 사람, 명상에 잠길 수 없는 사람은 죽은 자와 마찬가지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과학과 예술은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상이한 정신 활동이라고 할 수 없다. 마치 무지개 색깔이 서로 겹쳐 들어가면서 연속되는 것과 같이 어느 지점에 이르면 과학과 예술은 중첩되어서 분명하게 구별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1996년 | 1997학년도 대수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