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과학 이론은 우리가 세계를 보는 눈이기도 하다. 흔히 과학이란 관찰과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어떤 과학 이론도 관찰 결과와 일치하지 않으면 수정되거나 폐기될 수밖에 없다고들 생각한다. 경험된 사실들을 토대로 해서 형성된 과학 이론은 자연 현상에 대해 기술하고 예측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므로, 어떤 이론에서 예측된 내용이 실제 관찰 결과와 일치하지 않을 때 그 이론은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관찰 결과가 이론의 생사를 결정하는 잣대가 된다.

 

(나)   그러나 관찰과 이론의 관계가 항상 그렇게 일방적인 것만은 아니다. 뉴턴의 예를 들어 보자. 뉴턴은 중력과 운동에 관한 이론을 발표하여 과학사상 거의 유례가 없는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 당시 뉴턴의 이론이 모든 관찰 결과와 일치하지는 않았다. 천문 학자들은 뉴턴의 이론을 근거로 예측한 달의 운동이 관찰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은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천문학자들에게 달을 관찰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고려해서 다시 관찰하도록 충고하였다. 천문학자들은 뉴턴의 충고를 따라서 그들의 관찰 방법을 수정하였고, 그 결과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천문학자들이야말로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격이라 할 수 있다.

 

(다)   뉴턴의 이론이 발표된 이후 거의 한 세기가 지나서 천문학자들은 다시 천왕성의 궤도가 뉴턴의 이론이 예측한 위치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들은 뉴턴의 이론을 의심하지 않았다. 따라서 천왕성의 궤도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행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뉴턴의 이론을 토대로 그 행성의 위치와 질량을 계산해서 추적한 결과 실제로 해왕성이라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론이 새로운 발전을 유도한 사례이다. 이처럼 과학자들이 이론에 모순되는 관찰 결과가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이론을 쉽게 포기하지 않은 예는 과학사에 드물지 않다.

 

(라)   뉴턴의 이론은 그것을 신뢰했던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서 명료하게 다듬어졌고, 과학사에 탁월한 업적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이와 같이 권위 있는 과학 이론은 토마스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의 역할을 한다. 패러다임이란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의 총체를 말한다. 패러다임은 과학적으로 탐구할 만한 문제를 규정해 주고, 과학자들이 취할 수 있는 문제 해결 모형을 제공하며, 연구 결과의 타당성을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 과학에서 패러다임의 존재는 거의 절대적이어서,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보호하려고 한다. 따라서 패러다임과 일치하지 않는 관찰 결과가 나왔을 때, 과학자들은 이론을 의심하기보다 관찰 결과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실험을 통해서 그 불일치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마)   그러나 이론에 모순된 관찰 결과들이 증가하면 패러다임은 위기를 맞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런 관찰 결과들을 해석하기 위한 ⓐ새로운 이론들이 쏟아져 나와 서로 경합하는 ㉡혼돈 (混沌)의 시기로 접어들게 한다. 이 때에도 과학자들은 하나의 이론이 승리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확립되기까지 기존의 패러다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론에 모순되는 관찰들, 다시 말해서 이론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는 반례(反例)들을 앞에 놓고서도 기존의 과학  이론을 포기하지 않는 과학자들의 태도는 도저히 합리적이라 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자들의 태도가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만은 없다. 과학적 이론이란 세계를 보는 도구이며, 도구 없이 세계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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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