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photagram.org


한국인의 전통적 명분관은 기본적으로 신분 질서나 상하의식에 따라 각각의 분수를 지키도록 규정하여 사회적 역할을 제한하는 계층적 명분론의 성격을 지니며, 동시에 개인이나 사회가 당면하는 문제에 대응하는 판단이나 행위에 대하여 그 정당성을 부여하는 도덕적 명분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계층적 명분관은 사회 내에 엄격한 계층 구조를 형성함으로써, 안정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하였다. 가령, 부모와 자녀, 부부, 형제, 고부(姑婦)등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나타나는 계층적 성격에 따라 각자에게 명분을 부여함으로서 가족적인 질서를 지탱해 주었던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명분관에 따라 부모의 도리나 자식의 도리 또는 임금의 도리나 신하의 도리 등, 각자 지켜야 할 도리가 명분으로 주어지게 되면, 이 명분은 위아래의 어느 쪽에 대해서도 지켜야 할 규범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경우 명분이 계층적이라 하여, 이것이 윗사람에게는 관대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억압적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 안에서 흔히 일어나는 억압적인 현상은 힘 있 는 강자가 명분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크게 보아 전통 사회에서는 오히려 위아래의 구성원이 각각 그 역할에 따라 명분의 제약을 받음으로써 공동체의 질서와 결속을 확보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전통 사회에서는 신분에 따른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명분을 앞세워 억제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또한 명분론은 기존의 안정적인 질서를 깨뜨리고 역동적인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진보적 요구를 억누르는 보수적 성격도 띠고 있었다. 이 같은 계층적 명분관은 근대로 내려 오면서 신분 제도가 동요하고 붕괴함에 따라 점차 타당성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분수를 지 키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면서, 도전과 모험의 진취적 태도를 부정하는 의식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도덕적 명분관은 인간의 모든 행위에 대해 인간의 본성에 근거하는 도덕적 정당성의 기준을 제시함으로서 개인의 정의감이나 용기를 뒷받침한다. 즉, 불의에 대한 비판 의식이라든가 타협을 거부하는 선비의 강직한 정신 같은 것이 바로 그 것인데, 이는 우리 사회를 도덕적으로 건전하게 이끌어 오는데 기여하였던 것이다. 또한 사회적 행위에 적용되는 도덕적 명분은 공동체의 정당성을 확고하게 하여 사회를 통합하는데 기여해 왔다. 그러나 자신의 정당성에 대한 신념이 지나친 나머지, 경직된 비판 의식을 발휘하게 되면 사회적 긴장과 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다. 예컨대 조선 후기의 당쟁(黨爭)은 경직된 명분론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심화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또한 같은 시기에 도덕적 명분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명분의 형식화와 ㉢체면치레가 성행하게 되면서 실용적인 측면이 소홀히 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성리학적 의리에 집착한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논의가 만연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실용적 관점에서 의리론 적 명분론의 허구성을 비판한 견해를 당시 실학자들의 저술 가운데서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 


현대의 우리 사회는 구성원 사이의 평등을 기본 원리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계층적 명분관은 설득력을 잃어 가고 있다. 그러나 평등 사회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이나 역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분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우리는 오늘의 시민 사회에 어울리는 새로운 명분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경제 정의의 실천이나 민족 통일 등 우리가 당면해 있는 이 시대의 구체적 과제가 현실적 조건에 따라 특수한 명분을 제시하여 우리를 제약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_윤병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