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그림 가): '파이프가 있는 고흐의 의자'(고흐 作). 오른쪽(그림 나): '고갱의 의자'(고흐 作)


자화상은 화가들이 자신을 그린 그림이다. 흔히 자화상이라고 하면 귀를 자른 고흐의 자화상과 같이 강렬해서 한번 보면 절대 잊기 어려운 그림들을 떠올린다. 그런데 자화상이라고 해서 얼굴만 그렸던 것은 아니다. 사람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 자화상도 있었다. 인생의 허무와 죽음, 무상 등의 의미를 골동품, 꽃, 음식, 해골 등의 상징물로 표현해 낸 그림들을 보면 화가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얼굴 없는 자화상의 대표적 사례로는 고흐의 그림을 들 수 있다. ‘파이프가 있는 고흐의 의자[그림(가)]’에서 고흐는 자신의 의자를 아버지가 물려준 담배 파이프와 담배쌈지를 올려놓은 매우 소박한 의자로 그렸다. 고흐는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려고 했을 정도로 아버지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림 속의 ‘의자’는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던 아버지로부터 강한 정신적 영향을 받은 고흐 자신을 상징한다.


‘고갱의 의자[그림(나)]’에는 고갱이 자기 곁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고흐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평소 고흐는 예술가들이 함께 살며 작업을 하는 공동의 거처를 갖기 원했고, 활달하고 남성적인 성격을 지녔던 고갱이 자기의 제안에 동의했을 때 뛸 듯이 기뻐했다. 말하자면 고흐는 고갱에 대한 애착을 의자라는 상징물로 표현한 것이다. 불타는 초와 책이 놓인 화려한 ‘의자’는 고갱에 대해 강한 애착을 느끼는 고흐 자신을 상징하며, 고갱이 와서 앉아 주기를 바라는 고흐의 수동적이며 여성적인 성향을 보여 준다.


정신분석학자 나게라도 ‘고갱의 의자’가 ‘양성적 갈등’을 드러내는 그림이라고 보았다. 그는 고흐가 화려한 양탄자를 깔고 열 두 송이의 해바라기를 그려 벽에 거는 등 고갱이 머물 방을 정성스럽게 꾸몄던 사실에서 고흐의 심리 속에 감추어진 여성성을 읽어 냈다. 나게라는 고흐가 고갱을 면도칼로 공격하려 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그는 고흐가 강한 성격을 가졌던 고갱을 만나 그의 인정을 받고자 했으나 그 노력이 실패하자 증오심에 사로잡혀 공격했다고 설명했다. 애증의 복합적인 감정이 고흐로 하여금 ‘고갱의 의자’를 그리게 했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얼굴 없는 자화상 속에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화가의 심리가 깊숙하게 감추어져 있다. 그렇게 보면 얼굴 없는 자화상은 일반적인 자화상에 비해 화가에 대한 정보를 오히려 더 풍부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조이한.진중권, 『천천히 그림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