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철, '바위 위의 할머니'.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할머니가 폭포가 쏟아지는 벼랑 위에 서 있는 뒷모습을 찍은 이 사진은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때 사진은 기록성을 고유한 특성으로 삼았다. 다른 예술 매체와 구분되는 사진 매체의 존재 이유를 기록성에서 찾기도 했다. 사진이 기록성을 고유한 특성으로 삼게 된 것은 결코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숙명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 사진은 기록성에서 벗어나 점차 추상화되어 가고 있다. 사진이 추상화되어 간다는 것은 사진 매체의 특성으로 볼 때 모순적 현상이다. 다른 모든 예술은 상상만으로도 얼마든지 작품 제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구체적 사물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사진은 구체적 사물을 전제하고서야 작품 제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사진은 추상화되어 가고 있는가? 사진은 구체적인 사물을 담는 매체이지만 사진이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 곧 작가의 생각이나 느낌은 추상적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추상적 주제를 담아야 할 사진이 추상을 지향하는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러나 ‘사진의 추상화’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추상’이란 구체성을 극복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것이지만 사진은 구체적 모습을 벗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에 찍힌 사물은 작가가 해석한 주관적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형태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아직 ⓐ해석되지 않은 사물 자체로 인식된다. 사진에 찍힌 여인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여인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는데, 사람들은 여인의 마음을 느끼기 이전에 여인의 모습만을 본다. 이러한 구체적 형태가 사진의 추상화를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 요인이다.


그런데 간혹 사진의 추상을 회화의 추상과 같은 의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회화는 사물의 형태에 묶이지 않는 유연한 매체임에 비해, 사진은 사물의 외형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완고한 매체이다. 이처럼 두 매체는 서로 다른 예술 양식이므로 회화적 추상은 사진적 추상의 모범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회화적 추상을 그대로 사진에 적용해서 추상 사진이라 말한다. 그들이 추상 사진이라 분류한 것을 보면 영상이 흔들렸거나 초점이 흐려진 것, 또는 추상 형태를 모방해서 사물의 형태를 왜곡시켜 놓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추상회화의 형태적 모방일 수는 있어도 추상 사진일 수는 없다. ‘추상’이란 사물에서 어떤 속성 또는 특성을 ‘추출한’ 형태여야 하기 때문이다. 초점이 흐리거나 떨린 사진은 기계적 조작에 의해 상이 왜곡된 것이지 사물의 외형에서 ‘추출되어’ 걸러진 상이 아니기 때문에 추상 사진이 될 수 없다.


외형을 벗어날 수 없는 사진이 진정한 의미의 추상 사진이 되기 위해서는 외형을 놓아둔 채 외형을 뛰어넘는 길밖에 없다. 그렇게 하려면 사물을 사물이 가진 원초적 의미에서 벗겨내어 제2의 의미로 재창조해내야 한다. 제2의 의미로 재창조된 사물은 외형상 현실적 사물의 형태는 유지하지만, 그 사물은 작가가 해석한 이미지로 현실적 사물이 아니다. 즉, 작가의 주관적 관념을 시각화한 하나의 기호인 것이다. ‘여인의 모습’을 통해 ‘여인의 고독감’을 드러내려는 추상 사진이 있다고 하자. 이 때 사진에 찍힌 ‘여인의 모습’은 ‘여인의 고독감’이라는 작가의 관념을 시각화하기 위한 기호이자 이미지이다. 추상 사진의 작가는 자신의 주관적 관념을 시각화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만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이질적 사물들을 조합함으로써 기이함과 신비감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태를 벗을 수 없는 사진은 형태를 극복하여 추상화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추상 사진은 외형이 아니라 외형을 뛰어넘는 의미의 창조를 통해 주제 의식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 한정식, ‘사진의 추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