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하면 흔히 ‘ㄱ, ㄴ, ㄷ’ 순으로 배열된 국어사전을 떠올리지만, 인간의 머릿속에도 사전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머릿속 사전’이라 부른다. 그런데 책으로 된 종이 사전과 머릿속 사전의 조직은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인다. 종이 사전은 한글 자모 순서로 단어들을 배열하는 것이 표준이다. 머릿속 사전도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다면 말실수를 할 때 한글 자모 순서상 가장 근접해 있는 단어가 선택될 것이다. 가장 가까이 있으므로 그 단어를 얼른 생각해 낼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청진기’라는 단어 대신에, 사전에서 그 다음에 배열될 것으로 예상되는 ‘청진선’이 선택되는 식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다. 


머릿속 사전의 조직을 살펴보는 방법의 하나로 단어 연상 실험을 들 수 있다. 이 실험은 자극어를 준 뒤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를 말해 보게 하거나 떠오르는 단어들을 생각나는 대로 모두 말해 보게 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자극어로 ‘바늘’을 제시했을 때 나오는 전형적인 반응어는 ‘실, 핀, 날카롭다, 꿰매다’ 등이다. 이는 깊이 사고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나오는 반응어가 머릿속에서 자극어와 연관을 맺고 있는 단어들이라는 가정에 부합한다. 우리는 ‘하늘’이라든가 ‘공부’와 같이 ‘바늘’과 상관이 없는 반응어를 기대하지 않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반응하는 사람은 드물다. 


연상이라는 것이 비록 언어의 규칙 기반적인 다른 측면들처럼 명쾌한 설명력을 지니지 못한다 해도, 그동안의 연구 결과 사람들은 주로 ⓐ등위적, 배열적, 상위적, 동의적 연결 관계에 있는 단어들을 떠올리는 것으로 드러났다. 등위적 연결은 ‘나비-나방’처럼 수준이 유사한 단어들과 ‘왼쪽-오른쪽’처럼 반의 관계에 있는 단어들의 연결을 말한다. 배열적 연결은 ‘소금-물’처럼 함께 나열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단어들의 연결을, 상위적 연결은 ‘나비-곤충’처럼 하위어와 상위어의 연결을, 동의적 연결은 ‘배고프다-굶주리다’처럼 뜻이 유사한 단어들의 연결을 말한다. 이들 중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단어들은 등위적, 배열적 연결 관계에 있는 단어들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이것들의 연결이 다른 것들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 덧붙여 실어증 환자들에 관한 실험 연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실험에 의하면, 어떤 환자는 부엌 용구의 이름은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았지만 과일 이름은 모두 잊어버렸고, 어떤 환자는 의복 이름은 댈 수 있었지만 옷감의 종류는 말하지 못했다. 이는 ‘부엌 용구, 과일 이름, 의복 이름, 옷감 이름’ 등이 모두 독립된 장(場)으로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음을 함축한다. 


위와 같은 실험들을 통해 머릿속 사전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첫째, 머릿속 사전은 서로 관련을 맺는 단어들이 하나의 장을 이루어 거미줄처럼 조직되어 있을 것이다. 둘째, 단어들 사이의 연결 정

도는 그 관계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는데, 특히 강력한 연결 관계를 맺는 단어들이 있어서 이 단어들은 서로 가까운 곳에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셋째, 단어들은 일정한 주제들을 중심으로 무리지어 모여 있는데, 어떤 주제를 중심으로 모여 있는 각 장들은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 말은 하나의 장이 다른 장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어느 정도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장치를 갖고 있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