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운 우습 깊은 밤에 모진 광풍이 일어나 바람은 우루루루루루루 쇄......."


<춘향가> 가운데 춘향이 갇혀 있는 옥방(獄房)의 광경을 묘사한 '옥중가'의 한 대목이다. 이 소리를 듣고 바람이 천장을 휘몰아서 마룻바닥을 스쳐 가는 음산한 옥방의 분위기가 느껴져 청중이 공감하게 되었다면, 창자(唱者)는 이 대목의 이면을 잘 그렸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렇다면 이면을 그린다 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그린다'는 말은 소리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창자의 음악 행위를 나타내 므로, 이면은 당연히 음악 행위에 의해 구현된 그 무엇에 해 당한다. 창자는 소리를 통해 사설의 내용인 옥방의 광경을 묘사했으니, 이면이란 사설 내용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면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옥방의 광경을 제대로 묘사하려면 그 음산하고 비감한 분위기, 거기에 내재되어 있는 본질적 의미까지도 있는 그대로 표현해야 한다. 이 면을 잘 파악한 후 성음[음색], 조[음계], 장단 등을 복잡하게 선택하고 구성하여 사설 내용을 실감나게 소리해야 이면에 맞는다는 평을 들을 수 있으니, 이면에 맞게 잘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면 찾다가 소리 못한다."라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사설 내용 그대로를 음악으로 표현해야만 이면을 그렸다고 생각하는 경우, 음악적 표현에 제약이 있을 수 있다. 만일 사설 내용에 대한 해석이 어떤 권위에 의해 고정되어 있다면, 이면을 그리는 일이란 이미 고정되어 있는 해석을 음악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된다. 창자가 음악적 구성을 새롭게 변화시키면 "이면에 맞지 않는다."라는비판을 받게 된다. 판소리 유파나 계보의 음악적 특성을 의미하는 '제'나 '바디'가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생각 때문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사설 내용에 대한 해석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 이 경우 이면을 그린다는 말 에는 창자의 주체적 해석을 허용하는 의미도 포함된다. 따라서 창자는 사설 내용을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여 기존의 음악적 구성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판소리 전승상에 없던 독창적인 창법을 의미하는 '더늠'이 계속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생각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자칫 자신의 미숙한 소리를 합리화하는 논리로 이용될 수도 있다.


사설 내용이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든,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든 간에, 이면이란 창자가 소리로 표현해 내고자 하는 바탕을 의미 한다. 모든 판소리 창자들은 "이면을 잘 그렸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 말을 듣기란 쉽지 않다. 이면을 잘 그렸다는 찬사를 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명창(名唱)의 영예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