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미의식은 변하기 마련이고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미술의 풍조도 변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유행에 좌우되지 않고 미술 작품을 평가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기준은 없는가? 바로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미술품이 살아 숨쉬는 데서 느끼는 긴장된 느낌, 즉 생명력이 기준이다. 길거리에서 파는 ㉠유명 작가의 아류작과 오랜 세월 창작의 고통을 겪은 작품이 같을 수는 없다. 생명력은 미술 문화의 황금기라고 해서 넘치는 것도, 쇠퇴기라고 해서 쇠잔해지는 것도 아니다. 석굴암같이 완벽한 조형미를 과시하던 8세기 조각 작품들 중에도 의외로 생명력이 약한 작품이 존재하며, 9세기 조각처럼 기하학적 형상으로 단순화되는 시기에도 강한 생명력을 내뿜는 작품이 있을 수 있다. 결국 생명력에 의한 작품의 완성도가 중요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의 전환기에 만들어진 미술에서 강한 생명력이 뿜어 나오곤 했다.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면 의욕이 넘쳐 에너지가 과도하게 분출되는 미술이 부상하는 것이다. 삼국 중에서 가장 열세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그 자신감이 조각에 금세 표출되었던 경우가 있다. 매우 권위적인 ㉡불상의 모습이 등장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 모습이 역력히 나타난다. 또한, 민간 문화의 득세에 힘입어 성행한 19세기의 민화에서도 기교를 배제한 자연스러움 속에서 생명력이 발현되었다.


민화는 일반 회화와 같이 정해진 규칙을 따르지 않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통하여 자유자재로 변형시킨 회화이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속에서 생명이 살아 넘치는 미술품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작품을 대할 때 작품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이 느껴질 수 있다면 그 작품 속에는 생명력이 녹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생명력이 작품 속에 깃들여지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작가가 작품을 창작하는 과정에 담겨져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작가의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부터 창작은 시작된다. 애정이 결여되면 ㉢대상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없고 내밀한 대화도 나눌 수 없다. 고갱은 타히티 섬을 진정으로 좋아했기에 그곳 여인들의 강렬하고 아름다운 생명력을 작품을 통해 전할 수 있었고, 공재 윤두서는 말을 진정으로 사랑하였기에 살아 움직이는 섬세한 필치로 말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재 윤두서, '백마도'


이렇게 작가가 대상을 그리려면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이 필수적이다. 그렇다고 애정만 갖고 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을 대하는 기본적인 감정인 애정은 물론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이 때의 방법은 대상을 그릴 때, 대상의 본질(本質)을 이해하기 위한 창작 과정을 말한다. 북송대 문인화의 대가였던 문동의 대나무 그리는 과정에 대해 소동파(蘇東坡)는 이른바 ㉤‘흉중성죽(胸中成竹)’ 즉 ‘가슴속에 대나무를 이룬다’고 하여 ㉮대나무가 그인지 그가 대나무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야 대나무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가슴속에 맺힌 대나무를 풀어놓으면 대나무가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생명의 미학은 우리 조상들이 미술을 보아왔던 기준이었고, 앞으로 우리들이 미술을 보아야 할 표준이다. 작가가 대상의 생명력을 작품 속에 그리듯이 독자도 작품을 통해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배양해야 한다. 미술을 생명체로 인식하고 바라보고자 하는 ‘생명의 미학’이야말로 진정으로 미술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자세인 것이다.


― 정병모, 『미술은 아름다운 생명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