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 구글 이미지 검색 결과


분청사기는 전통 도자 양식 중 하나로서 점토[청자토]로 만든 형상 위에 화장토[백토]를 칠한 전후에 바탕을 장식하고 유약을 발라 구워 낸 그릇을 말한다. 고려 말 퇴락해 가던 상감청자의 뒤를 이어 등장한 분청사기는 조선 중기 이전까지 널리 쓰였다. 우리나라 도자기 중에서는 가장 순박하고 서민 적이며, 일상의 생활 용기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예술적 조형미도 매우 뛰어났다. 


퇴락해 가는 예술로부터 태어나 실용적 목적에서 사용되었던 분청사기는 어떻게 해서 예술성을 얻게 되었을까? 분청사기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는 국가에서 도자의 생산과 유통을 관장하였다. 서남해안 일부 지역에 설치되었던 관요(官窯)에서는 국가의 강력한 보호와 규제 속에 상감청자 등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도자들은 왕실과 사원, 귀족층을 위한 제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품질이 일정했다. 국가의 철저한 감독 아래 도공들은 독점적 생산자로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신분의 구속과 강력한 규제를 받아야만 했다. 국가의 간섭이 그들에게는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14세기 후반 고려 왕조가 쇠운을 맞게 되자, 도공들은 정치적 혼란과 왜구의 침입을 피해 각지로 흩어져 살길을 찾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민간 가마터인 민요(民窯)가 만들어졌다. 민요의 등장은 관요에서 만들어 내던 상감 청자가 근본적으로 쇠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서민층으로 까지 확대된 도자기 수요에 부응하여 저렴한 생활 용기들을 제작하는 생산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으로는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나 개발을 크게 기대할 수 없었고, 이전에 사용하던 재료들을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품의 질이 일정하지 못하고 전반적으로 조악해지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숙련된 제조 기술을 보유한 도공들은 지역 특성에 맞는 질 좋은 제품들을 만들어 냈으며, 차츰 전통적인 도자 기술에 구애되지 않는 새로운 방식의 분장 기법들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새로 만들어진 제품들은 상감청자의 전통 위에 서 있기는 했지만, 더 이상 상감청자와는 같지 않았다. 분청사기라는 새로운 전통 도자 양식이 탄생한 것이다.


각 지방에서 이름을 얻은 분청사기들은 왕실이나 관에서 사용되기도 했다. 뛰어난 제품들은 토산 공물로서 중앙에 진 상되었다. 그런데 상당수가 품질이 떨어지거나 중간에서 착복 되어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게 되자, 세종 3년에 이르러 진상하 는 분청사기 제품의 밑면에 장명(匠名)을 쓰게 하는 조처가 내려졌다. 개인의 창작이라는 개념이 아직 존재하지 않던 시 대였지만, 이 조처는 도자 생산의 질 관리를 가능하게 하였고, 도공들에게 두터운 전통의 경험 위에 그들 나름의 독특한 장 인 정신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분청사기는 기능적 이면서도 심미적인 조형미를 갖춘 예술 형식으로 발전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