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는 믿을 만한 지도를 손에 들고 과거라는 큰 도시를 찾아드는 여행가와 같다. 그렇다면 역사가의 지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많은 사실 속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려 낼 수 있게 하는 문제 의식이다. 또한 그것은 어느 시대를 역사적 전후 관계에 따라서 전체를 파악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관점이다. 역사가의 사명은 바로 이러한 문제 의식과 관점을 확실하게 세워서 사회와 인간 생활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있다. 결국 역사가의 문제 의식은 궁극적으로 역사가의 사관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역사가의 사관(史觀)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역사가의 사관 형성은 무엇보다도 정직한 마음을 가지는 데서 가능하다. 그것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솔직하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가 아는 것이 남보다 많다 하거나, 자기 민족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라 주장하고, 설사 그러한 역사가 영광 아닌 고난의 역사라 해도 그런 대로 소위 ‘주체성’이 우수했음을 강조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미화(美化)는 과거를 바꾸어 놓을 수 없고 또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랑케는 이러한 역사가의 정직을 강조하면서 ‘일어났던 그대로’ 사실을 재구성하라고 말한 바 있다. 


다음으로 역사가의 사관 형성에 도움이 되는 덕성은 금욕주의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이 금욕 원리에서 정신의 평화를 찾았듯이 역사가는 현실적 욕망의 테두리를 벗어남으로써 대상을 관조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다. 이러한 역사가의 관조의 위치는 잡다한 인간 사회의  모든 현상을 잘 관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역사학의 이런 ‘몰실리성’은 역사학을 진정한 기초 학문, 즉 인간 교양의 학문으로 승격시킨다. 역사가는 알렉산더 대왕 앞에서 태양볕을 즐기던 통나무 속의 디오게네스와 같다. 그는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지도 않으며 출세를 걱정하느라 ㉠눈이 어두워지지도 않을 것이기에 역사학이 진정한 아카데미시즘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학이 현실적 욕망의 테두리를 벗어나 관조하는 ‘몰실리성’을 지닌다고 해서 이것이 ‘현실 불감증’과 동일시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역사학은 가장 현실에 민감하고 미래에의 전망과 결부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역사학의 출발점은 현재에 있으며, 과거는 단순한 ‘죽은 과거’로 취급되는 데 있지 않다. 역사에서의 객관성이란 과거 사실 그 자체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의 연관성 속에서 과거를 인식하는 것이다. ㉡일찍이 드로이젠이 랑케의 객관성을 가리켜 ‘환관(宦官)의 객관성’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역사가의 사관 형성에 있어 덧붙일 것은 역사가의 지도 그 자체는 ⓐ흠잡을 데 없는 완성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학도들은 기성 역사가들이 만들어 놓은 지도에 따라 역사 연구를 시작하지만 점차로 그러한 지도에 ⓑ부족한 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마치 능숙한 여행가가 지도 위에 적색 연필로 가필하듯이 역사학도들은 차츰 ⓒ기성의 사관을 보완‧수정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관으로 대체할 생각을 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관의 수정 내지 그 새로운 설정은 한 역사가의 생애에 걸친 작업이므로 어느 역사가의 ⓔ독자적인 사관이 항구적 가치를 갖는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도 오랜 시일에 걸쳐 평가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 차하순, '역사가의 사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