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에 바탕을 둔 합리성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사고 방식으로 본다면, 신화는 인류가 지난날 한때 만들어낸 허구적 창안물에 불과하다. 더구나 자연물에 인격성, 나아가 신성을 부여하는 신화적인 발상은 현대인의 사고 방식에서는 미신으로 ⓐ치부(置簿)된다. 하지만 신화는 현대 사회의 탈마법화라는 구호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심지어 신화적인 세계를 갈망하게 만들기도 한다. 신화에 어떤 힘이 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신화의 힘은 무엇보다도 나와 인류, 나아가 우주에 대한 근원적인 진실을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한 신화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화는 삶의 무수한 다양성을 보여주며 역사와 신성의 밀접한 관계를 알게 해준다. 신화 속의 신들은 인간 세계에서 원초적 의미를 갖고 있는 총체적 경험을 형상화한 것이다. 인간은 신화를 통해 삶의 뿌리를 찾으며 고립된 개체를 넘어선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받기에 이른다. 


우리가 오늘날 과거의 신화를 뒤적이는 것은 허황한 전설에 대한 ⓑ탐닉(耽溺)이 아니라 현실을 바로 보고 비판하기 위해 늘 대조하고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될 전거의 확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신화가 문학·철학·인류학·정신분석학·사회학 등 여러 분야에서 계속 ⓒ소진(消盡)될 줄 모르는 해석과 논쟁의 진원지 역할을 해 온 사실이 이를 잘 뒷받침해 준다. 패륜아 오이디푸스는 현대 심리학에서 다시 부활하였고, 자신을 본 남자들을 돌로 변하게 하는 메두사는 현대 페미니즘 ⓓ담론(談論)의 발전을 이끌어왔다. 신화는 이처럼 인류 정신 문화의 토양을 형성하며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신화가 지니는 또 다른 힘은 신화가 현대인의 사고 방식과 다른 인식의 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누구인지, 이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에 대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아주 부분적인 해답을 내놓을 뿐이다. 현대인의 심리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불안감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런 면에서 뇌성과 더불어 번쩍이는 번갯불에서 제우스를 보고, 기다리던 봄의 도래에서 페르세포네의 귀환을 보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현대인들보다 더 풍성하고 총체적인 인식의 틀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신화적인 인식은 비(非)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전(前)이성적이라거나, 신화는 생명 연대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신화학자들의 언급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틀만으로 불안하게 버티고 있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그동안 자신들이 비워두었던 인식의 틀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신화는 인간 역사를 재조명하고 반대로 인간 역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침전(沈澱)되어 신화가 된다. 독선과 불안이 만연한 현대 사회에서 신화적 인식은 우리들에게 근원적 반성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또한 갖가지 병폐를 만들어 내고 있는 인간 중심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생명 연대 의식을 바탕으로 한 총체적인 시각을 아울러 제시해 주며, 하나의 틀로만 세계를 바라보던 인간들에게 균형 잡힌 인식의 틀을 잡아줄 것이다. 


― 남진우, '신화 속에 숨은 인간의 뿌리를 찾는다'